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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잊을 수 없는 사랑(수 필)


작품명 : 잊을 수 없는 사랑(수 필)

작가명 :
안귀순

2004, 수필과 비평 3,4월호 초대수필
2005, 한국비평문학회가 선정한 <문제수필> 선정
2006, 국제펜클럽 선정 영문 번역되어 해외에 소개

安 貴 順

부산의 도심 속에 적막한 섬 같은 공원이 있다. 반세기전 한국동란에 참전하여 희생한 유엔장병들의 유해(遺骸)를 모신 세계 유일의 기념묘지다. 동란 직후에는 16개국 11,000 여 명의 영령을 봉안했지만 그 동안 고인의 본국에서 차례로 모셔가고 이젠 2,300여기의 묘가 남아 있다.

수은주가 빙점아래로 곤두박질하던 연초에 공원을 찾았다. 묘역을 에워싸고 있는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가 예사롭지 않다. 고인의 본국에서 또는 그 유족들이 애처로운 영혼을 달래며 심고 간 수목들이라 사랑과 우정의 상징이다. 반세기 세월만큼 아픔도 자라는지. 그리움에 몸집을 부풀리던 향나무도 허리가 둥실하니 원숙한 중년 티를 내고 있다. 시끌시끌한 세상에 고요한 정적이 감도는 묘역에 들어서면 신기한 기운이 느껴진다.

세사에 들뜬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게 하는 매력이랄까. 그 기운에 잠겨 궁시렁궁시렁 넋두리도 풀어내고, 나를 휘감고 있는 우울마저 질겅질겅 십다보면 세상이 조금은 밝아 보인다. 그럴 땐 잠든 영령들을 깨워 멋진 데이트도 꿈꾸어본다. 둥지가 불편하지 않느냐. 외롭지 않느냐. 너스레도 떨면서. 그러기엔 민망하게 하품 나는 느슨한 계절보다, 마음이 정숙해지는 하얀 엄동이 좋다. 속살을 파고드는 아린 바람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텃새들이 묘비 사이를 콩콩 뛰어다니며 수다를 떤다.

화려한 날개는 어쩌고 시린 발로 걷느냐고 싱겁게 묻는다. 털모자에 안경, 마스크까지 두른 복면강도 같은 차림으로 무례하게 넋두리나 늘어놓는 당신은 누구냐고 되묻는다. 외로운 영혼을 위로하려는 심사보다 괜스레 위로를 받고 싶어 찾아온 내 마음을 저 영물들이 눈치를 챘나 보다. 세계 만국기가 하늘을 찌를 듯 바람에 흔들리는 상징구역에 올라서니 지구촌 이웃들의 사랑이 뭉클하게 다가온다.

영국 885, 캐나다 378, 호주 281, 미국 36, 지난 월드컵 경기 때 이 나라에 축구신화를 남긴 히딩크의 조국, 네덜란드 묘역에도 117기의 유해가 있다. 그 국기 아래 '히딩크 감독 만세' 라는 축하 메시지를 담은 꽃바구니가 그날의 감격을 전해주고 있다. 3-4위 전에서 우리 선수와 멋진 페어플레이를 펼쳤던 터키도 462 분의 젊은이를 이곳에 잠재웠다. 승자와 패자가 정답게 어깨동무를 하고 '우리는 영원한 형제'라며 세계만방에 우정을 과시한 것도 젊은 천사들이 뿌린 피의 대가라 생각하니 정수리가 찡하다.

초승달과 별, 붉은 십자성에 빛나는 뉴질랜드 묘역에 들어섰다. 유별나게 허연 사진 한 장이 손짓을 한다. 고인의 생전 기록을 담은 묘비 위에 영국 풍의 깔끔한 중년 신사와 앳되 보이는 청년이 순하게 웃고 있다. 전쟁터로 떠나는 아들과 아버지가 기념으로 찍었으리라 짐작된다. 비바람에 젖을세라 단단히 코팅처리 하여 묘비에 붙여 두었다. 떠나고 오지 않는 자식을 기다리다 이역만리 찾아 나선 어버이, 낮선 이국 땅에 이름 하나 달랑 남겨놓고 사라진 자식의 무덤 앞에서 얼마나 절망했을까. 차마 그를 두고 돌아설 수 없어 고이 품고 다니던 사진 한 장을 슬쩍 안겨주고 갔는지도 모른다. 너무 외롭지 말라고, 서러워 말라고, 비문을 얼싸안고 단장의 눈물을 뿌렸으리라.

묘비 앞에 쪼그리고 앉아 뚫어져라 두 남자의 얼굴을 들여다보니 어린 날의 한 병사가
떠오른다. 산하를 뒤흔들며 전쟁의 포성이 울리던 동란 때의 일이다. 학교 앞, 신작로에 외국병사들을 태운 트럭들이 줄지어 섰다. 난생 처음 보는 외국인을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은 자동차를 에워싸고 모여들었다. 얼굴도 피부도 언어도 각기 다른 이국인들이 같은 행성에 살고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때 누군가 서툰 영어를 떠듬대며 먹을 것을 달라고 소리쳤다. 그것이 싫지 않은 듯, 그들은 웃으며 소지품을 뒤져 먹거리를 던졌다.
껌, 초콜릿, 통조림 등, 서로 먼저 받겠다고 우왕좌왕 밀치는데 어린 소녀가 멍청하게 서 있었다. 그때 한 병사가 그 소녀를 향해 무언가를 던졌다. 그러나 키 큰손들이 냉큼 가로챘다. 다시 또 그를 향해 던지고, 그때마다 빼앗기니 한동안 애를 쓰던 그는 옆 동료의 빵까지 빼앗아 또 던졌다. 끝내 그것조차 받지 못해 속상하기도 하여 아이는 그 소동에서 빠져 나와 버렸다.

난생 처음 만난 이국인에게서 받은 따뜻한 관심이었다. 설령 그것이 값싼 동정이라 해도 좋았다. 누군가에게 유별난 시선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얼마나 가슴 떨리던지. 그날 신작로에 있던 유엔군들은 신불산 인민군 토벌작전에 투입된 외국 병사들이었다. 노송을 베어내고, 불을 질러 만들어낸 붉은 황톳길을 따라 자동차는 꾸역꾸역 산을 오르고, 철모르는 아이들은 달콤한 껌 한 통에 팔려 줄레줄레 따라 갔다. 그 산 속에서 벌어지는 아비규환의 처절한 전쟁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느 날 또래 아이들과 산 중턱까지 따라가 유엔군들이 나누어주는 묵직한 깡통 두 개를 얻었다. 도대체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하여 뾰족한 돌멩이로 찍어 작은 구멍을 내고 보니 쇠고기 통조림과 하얀 가루설탕이었다. 깡통 구멍에 입을 대고 호르륵 빨아보니 혀에 감기는 달콤한 맛이 환상이었다.

전쟁터에서 보급품은 바로 병사의 생명이나 다름없다. 위태로운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가난한 이웃에게 따뜻한 미소로 인류애를 실천했던 천사들, 그들은 진정 평화와 자유를 사랑한 거룩한 휴머니스트였다. 하지만 안타깝고 민망한 것은 이 묘역이 생기고 오십여 년 동안 한 번도 유족들이 찾지 않은 묘가 너무 많다는 얘기다. 청춘의 꽃을 제대로 피우지도 못하고 떠났으니 애면글면 울면서 찾아올 자손이나 있었겠는가.

누군가 반도의 북녘 땅은 국군의 피로, 남녘 땅은 인민군의 피로 물든 나라라고 탄식했다. 어찌 그들뿐인가. 지구촌 인류의 고귀한 피를 안고 태어난 땅이다. 이 성스런 땅을 딛고 살기엔 너무 많은 빚을 안고 있는 셈이다. 적어도 사람답게 살아야 할만큼 말이다. 천진스레 웃고 있는 사진 속의 얼굴은 어린 소녀에게 무언가 주고 싶어 안타까워하던 그 병사의 눈빛만 같아 울컥 뜨거움이 치솟는다.

한 송이 장미를 사진 옆에 살며시 놓고 돌아서니 먼 숲에서 지켜보던 산비둘기 한 마리가 껑충껑충 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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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국문학도서관(www.kl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