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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

유엔기념공원과 관련한 신문, 잡지 등의 "언론 보도기사 모음" 입니다.

2006.06.26 주간조선/잊혀져가는 전쟁 , 6 ㆍ 25

HOME >> 특집 2006.06.26. 1910 호 주간조선 [잊혀져가는 전쟁 , 6ㆍ25] 두 유엔군 병사의 무덤에 50 년 만에 꽃을 바치다
영국에 연수 갔던 한국인 교사가 살아남은 전우의 부탁 받고 귀국해 헌화 부산 남구 대연동 유엔기념공원 영국군 묘역 . 찾는 이 없던 두 병사의 묘지에는 2002 년 여름부터 흰색 장미꽃이 놓이고 있다 . 맥 병사와 클레멘츠 병사의 묘지다 . 2001 년까지만 해도 두 병사의 묘지는 쓸쓸했다 .  
▲ 클레멘츠 병사 ( 앞쪽 ) 와 맥 병사의 묘지

2002 년 여름부터 매년 6 월 맥 병사와 클레멘츠 병사의 묘지를 찾는 사람이 있다 . 울산 삼호중학교 영어과 교사 김현경 씨 . 2002 년 여름까지 김 교사는 두 영국군 전사자의 존재를 몰랐고 알 수도 없었다 . 김 교사는 그 해 여름방학을 이용해 영국에서 연수를 받고 있었다 . 김 교사는 영국에 머물던 고등학교 시절 펜팔이었던 론 할아버지를 만나기로 한다 . 론 할아버지는 런던에서 기차로 90 분 걸리는 서포크주의 작은 마을 니드함마켓에 살고 있었다 .

론 할아버지는 김 교사를 반갑게 맞았고 한국과 관련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 이웃 마을에 한국전쟁 참전용사가 있는데 한번 만나보지 않겠느냐 ” 고 물었다 . 이렇게 하여 김 교사는 론 할아버지 집에서 한국전쟁 참전용사 크래스칼씨를 만나게 된다 .

당시 일흔한 살의 크래스칼씨는 한국에서 온 김 교사에게 한국과 관련된 추억을 많이 얘기했다 . 특히 그는 당시 영연방 전투부대 ‘ 더 로열 퍼실러스 (The Royal Fusilers)' 의 부대원으로 참여한 한국전쟁에서의 전투 경험을 털어놓았다 .

크래스칼씨는 1952 년 11 월 강원도의 어느 산간지역에서 북한군과 교전 중 등에 심한 부상을 입었다 . 그의 나이 열아홉 살 . 그는 일본으로 후송되어 5 개월간 치료를 받다 영국으로 귀환했다 . 그는 김 교사에게 이런 기억을 되살렸다 .

“ 치열한 교전으로 나무가 거의 없어진 산속이었다 . 몹시 추웠고 11 월인데도 눈이 많이 내리던 모습이 아직도 생각난다 .”

▲ ' 이스트 앵글리안 데일리 타임스 ' 의 2003 년 9 월 4 일 자 신문 .
 
크래스칼씨는 “ 나는 다행히 살았지만 가장 친한 친구인 맥 (D. Mack) 이 이 전투에서 죽었다 ” 고 말했다 . 맥 역시 ‘ 더 로열 퍼실러스 ' 의 부대원이었다 . 크래스칼씨는 “ 맥의 묘지가 부산의 유엔군 묘지에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무덤이라도 찾아봐 줄 수 없겠느냐 ” 고 김 교사에게 부탁했다 . 김 교사는 “ 그러겠다 ” 고 대답했다 .

크래스칼씨는 김 교사가 흔쾌히 동의하자 기쁜 얼굴로 “ 유엔 묘지에 가면 내 친구는 아니지만 인근 동네에 살던 클레멘츠 (J. Clements) 씨 묘지도 한번 찾아봐 달라 ” 고 부탁했다 . 클레멘츠씨는 ‘ 더햄 경보병대 (The Durham Light Infantry)' 소속이었다 . 론 할아버지는 “ 만일 클레멘츠의 묘지를 찾게 되면 그의 동생들도 무척 기뻐할 것 ” 이라고 말했다 . 이웃 마을에는 클레멘츠의 동생이 두 명 살고 있었다 .
김 교사는 한 달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 그리곤 주말을 이용해 부산 대연동의 유엔공원을 찾아갔다 . 김 교사는 이때 말로만 들었던 부산 유엔공원을 처음 방문했다 . 김 교사는 유엔공원 직원에게 맥과 클레멘츠의 이름을 대며 “ 묘지를 찾고 싶다 ” 고 말했다 . 김 교사는 쉽게 두 영국병사의 묘지를 찾을 수 있었다 .

마침 두 영국병사의 묘지는 서로 이웃해 있었다 . 그는 준비해간 장미꽃을 맥과 클레멘츠의 묘지 앞에 놓고 기도를 했다 . “19 살의 나이로 이름 모를 나라에 와서 죽는다는 말 한마디 못 남기고 안타깝게 전사한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나왔습니다 . 더군다나 지난 50 년 동안 두 사람의 묘지에 찾아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저며왔습니다 .”
 
▲ 2002 년 8 월의 크래스칼씨 . 그는 "1952 년 일본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부대 마크를 수놓았다 " 고 말했다 .

 
김 교사는 두 사람의 묘지 사진을 여러 장 찍어 크래스칼씨에게 우편으로 보냈다 . 이메일로도 보낼 수 있었지만 연로한 크래스칼씨가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아 우편으로 부쳤다 . 얼마 후 크래스칼씨로부터 답장이 왔다 . 크래스칼씨는 “ 친구의 묘지를 보니 미안했던 마음이 사라졌다 ” 고 말했다 . 크래스칼씨는 “ 클레멘츠의 묘지 사진은 그의 동생들에게 전해줬다 ” 고 덧붙였다 . 얼마가 지나 김 교사는 클레멘츠씨의 여동생에게서 감사의 편지를 받게 된다 .

그리고 거의 1 년이 지났을 무렵 , 김 교사는 크래스칼씨로부터 우편물을 받았다 . 크래스칼씨는 간단한 편지와 함께 신문기사를 하나 동봉했다 . 지역신문 ‘ 이스트 앵글리안 데일리 타임스 (East Anglian Daily Times)' 2003 년 9 월 4 일 자였다. 톱 기사의 제목은 ‘ 가족들 , 마침내 죽은 형의 무덤을 보다 ' 였다 . 이 신문사의 존 하워드 기자가 클레멘츠씨의 사연을 전해 듣고 기사화한 것이다 . 기사는 동생 피터 클레멘츠 ( 당시 68 세 ) 의 인터뷰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
“ 형의 전사 소식만 들었는데 50 년 만에 형의 마지막 안식처를 보게 되어 너무 기쁘다 . 형이 갑자기 한국전쟁에 자원했고 한국에서 19 살 생일이 막 지났을 때 총에 맞아 전사했다는 소식을 믿을 수 없었다 . ( 그 충격을 )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 그런데 형의 무덤을 보다니 기쁨의 눈물이 끊이질 않는다 .”

▲ 클레멘츠 병사 묘지 앞의 김현경 교사 .

신문기사는 여동생 머린 버클 ( 당시 60 세 ) 의 말도 인용해 실었다 . “ 내가 열두 살 때 오빠가 전사했다 . ‘ 오빠를 빼앗아간 곳 ' 이라는 기억 때문에 한국을 늘 음울하고 끔찍한 곳으로 생각했다 . 그러나 오빠의 묘지가 아름다운 꽃과 함께 잘 보살펴지고 있는 것을 보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 우리 가족 누구도 그의 무덤을 보지 못했는데 그녀 ( 김 교사 ) 가 한 일에 대해 정말 감사하다 . 그녀는 그 전쟁을 잘 모를 것이나 우리를 위해 그녀가 한 일은 정말 아름다웠다 .”

김 교사는 “ 단지 크래스칼씨와 한 약속을 지킨 것뿐인데 클레멘츠의 유가족을 감동시키고 지역 언론에 크게 보도돼 화제를 불러일으킬 줄은 상상도 못했다 ” 고 말했다 . 김 교사는 “ 앞으로도 매년 현충일에 두 분의 무덤에 꽃을 놓아드리고 유가족에게 사진을 보내겠다 ” 고 말한다 . 김 교사는 “ 한국전쟁에서 산화한 모든 이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이 땅에 평화통일이 오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 고도 했다 .
한국전쟁 기간 동안 유엔 16 개국 참전용사의 전사자는 4 만 895 명 . 이를 국가별로 보면 미국 3 만 6492 명 , 영국 1177 명 , 터키 1005 명 , 캐나다 516 명 , 호주 346 명의 순이다 . 미국은 전사자의 유해를 모두 본국으로 환송해 워싱턴의 한국전쟁 묘지에 봉안했다 . 현재 부산 유엔공원에는 영국 , 캐나다 , 터키 , 호주 등의 전사자 묘지가 있다 . 영국군 전사자 1177 명 중 885 기가 모셔져 있다 .

조성관 주간조선 차장대우 ( maple@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