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12월의 카이로선언에서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였고 이는 다시 1945년 7월의 포츠담선언에서 재확인되었다. 다만, 그 독립은 '적당한 시기에' 일본이 점령한 지역이었던 한반도는 군사적인 편의에 따라 38선을 경계로 남북한은 미소 양군에 의하여 분할 점령되었다.

분할된 상태로 미.영.소 3국외상은 그해 12월에 모스크바에서 회동하고 한반도에 5년간 신탁통치를 실시할 것에 합의하였다. 이에 대하여 한국민은 맹렬한 반탁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좌파세력이 소련의 지령에 의하여 찬탁으로 선회함으로써 정치적인 혼란을 가져왔다. 한국문제가 반탁운동으로 난국에 직면하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46년과 1947년 두 차례에 걸쳐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아무런 해결책도 강구하지 못한 채 결렬되었다.


1947년 9월에 미국은 소련의 반대를 뿌리치고 한국문제를 일방적으로 유엔에 제기하였다. 이로써, 38선을 경계로 한 남북한은 미소의 대립 속에서 이데올로기적인 갈등마저 겪으면서 국제무대에 노출되었다.

1947년 11월 유엔총회는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을 구성하고 그 위원단의 감시 아래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북한을 점령하고 있는 소련군사령관은 1948년 초에 활동을 개시한 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하였다. 이에 유엔소총회에서는 선거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를 결의하여 그해 5월에는 남한에서만의 선거가 행해졌고, 8월에는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으며, 그해 12월의 제3차 유엔총회는 한국을 '유일.합법 정부'로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북한에서는 김일성(金日成)을 중심으로 하여 '최고인민회의'선거를 실시하여 9월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함에 소련을 비롯한 공산제국은 이를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한반도에서는 남북한이 각각 별개의 정권을 수립함으로써 분단을 공식화하였다. 정부수립을 마친 북한은 곧이어 미소 양군의 철수를 요구하였고, 이에 부응하여 지정학적으로 유리한 소련은 그해 10월부터 철병을 개시하였다. 남한에서는 공산세력의 준동에 대응하여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을 요청한 바 있고, 이에 따라 미군의 주둔은 잠시 연기되긴 하였으나, 1949년 6월에 미국은 약 500명에 달하는 군사고문단만을 남긴 채 남한으로부터 철병을 완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