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명 : 프랑스공화국(La République Française)

수도 : 파리(Paris)

면적 : 675,417㎢(속령 포함 / 한반도의 3.1배)

인구 : 6,710 만명(2018)

종교 : 가톨릭, 신교, 유대교, 이슬람교

교육 : 의무교육 6-16세


면적은 63만 2000 km², 인구는 6699만 2699 명 (2019.1)이다. 정식명칭은 프랑스 공화국 (French Republic)이다. 수도는 파리이며 공용어로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있다. 국토의 모양은 6각형에 가까우며, 3면은 바다로 3면은 산지로 둘러싸여 있다. 프랑스 본국의 경우, 동쪽은 독일 ·스위스·이탈리아, 북동쪽은 벨기에·룩셈부르크와 접하고, 영국해협을 건너서는 영국과 마주하며, 서쪽은 대서양, 남쪽은 지중해와 에스파냐로 이어진다.프랑스는 해외 영토도 보유하고 있다.
면적은 영국의 2.5배, 독일의 2.2배, 이탈리아의 1.8배로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유럽 최대의 국가이며, 인구는 독일에 이어 2번째이다.
국기는 청(靑)·백(白)·적(赤)의 3색기로, 자유·평등·박애의 이상을 상징하고 있으며, 국가(國歌) 《라마르세예즈》는 1792년 루제 드 릴 대위가 작사·작곡한 것이다.


 

◈ 불-한 관계

1886년 체결된 한불수호조약(韓佛修好條約)과 통상장정(通商章程)·선후속약(善後續約)이 양국관계의 시초가 되었다. 이듬해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가 서울 주재 프랑스 초대 공사로 부임한다 한국의 주권상실과 세계 2차대전으로 양국간 공식관계는 끊어졌고, 1919년 4월 상해에서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파리위원부가 파리에서 1년간 활동하였다. 프랑스 공사관은 1949년에 개설되었다. 1950년 3월 서울에 도착한 초대 공사는 7월 포로가 되어 3년 (1950.7~1953.5)동안 북한으로 강제수용되었고 새로운 공사가 1954년 부임한다.

몽클라르 장군이 창설한 지원병으로 구성된 프랑스대대는 미 2사단 23연대에 배속되어 한국전 전투에 참여한다. 총 3 421명이 1950년 11월 29일부터 1953년 10월 27일까지 파병되었다.

오늘날 양국관계는 주로 외교∙경제∙대학협력∙과학∙문화 분야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대한민국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10월 13일~ 16일 프랑스를 국빈방문하여 프랑스 공화국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회담을 갖고 공동 선언을 채택하였다. 양국 정상이 채택한 공동 선언은 양국관계 증진을 위한 4개우선사항을 설정하였는데, 주요 글로벌 현안 (한반도, 기후변화대응, 무역다자주의 지지) 관련 정책대화 강화, 안보∙국방 분야 협력, 특히 상호투자 및 혁신 분야에서의 경제협력 강화, 과학∙교육∙ 문화∙스포츠 분야에서의 교류 및 협력 증진이 바로 그것이다. 대한민국은 프랑스에 있어 아시아국가 중 4위의 무역상대국이다. 혁신의 핵심 축으로서의 프랑스와 대한민국의 입지를 고려하여, 양국은 산업∙기술 협력 (스타트업, 미래 기술) 을 더욱 강화할 것이다. 2017년 프랑스의 대 한국 직접투자는 42억 4천만 유로, 대한민국의 대프랑스 직접투자는 10억 6천만 유로에 달했다. 한국파스퇴르연구소 및 세 곳의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원(CNRS) 국제공동연구소 (LIA)설치에 힘입어 한-불 대학∙과학 협력도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대학생간 교류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데, 프랑스는 한국에서 유럽국가 중 가장 큰 규모의 대학생 커뮤니티를, 서방국 중에서는 미국을 이어 두번째로 큰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다. 프랑스는 대한민국 대학생들이 가장 많이유학가는 유럽 대륙 국가이다. 2018년 12월에는 파리대학기숙사촌에 한국관이 개설되었다.

 

◈ 지원병으로 구성된 한국전참전 프랑스대대의 역사

한국전은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침공하면서 발발하였다. 북한군은 이내 서울을 점령하고 남한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데 성공한다. 1950년 7월 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미국군이 지휘하는 한국전 투입부대 유엔군사령부(UNC)를 창설하고, 유엔군사령부는 한국군에 대한 지휘권까지 넘겨받는다.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부임한 맥아더 장군은 동남쪽으로 진격하는 북한군의 남진을 차단하는데 성공한다.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은 서울과 인접한 인천에서 인천상륙작전을 전개하여 북한군의 병참선을 차단하며 북한군의 함락을 이끌어낸다. 맥아더 장군은 북진하며 북한군을 북중 국경까지 내몰았지만, 11월 말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서울까지 황급히 후퇴한다. 이러한 중대한 시기에 한국전참전 유엔 프랑스대대대가 11월 29일 부산에 상륙한다.

인도차이나에서 한창 작전중이었던 프랑스는 1950년 8월, 한국전에 참전할 프랑스 대대의 창설을 어렵게 결정하는데 그 배경에는 두 차례 세계대전의 영웅이자 외인부대 감찰관이었던 마그랭-베르느레, 즉 몽클라르 중장이 있었다. 몽클라르 중장은 다른 전장에서 작전중이던 프랑스부대들을 보전하기 위해 자원병들로만 구성된 대대를 만든다는 조건으로 프랑스대대의 창설을 이끌어낸다.

몽클라르 장군은 다양한 출신 (식민지 및 본국 주둔부대, 외인부대 등..)의 총 1021명의 용사들로 구성된 프랑스대대를 직접 지휘하기 위해 중령으로 스스로 강등한다. 프랑스대대는 1950년 12월 15일 미2사단 23연대에 배속되는데, 당시 미2사단은 중공군의 공격으로 후퇴하던 중 수많은 사망자를 낸 상태였다. 1951년 1월 4일~15일,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 혹독한 추위속에서 프랑스 대대는 원주지구 전투에서 처음으로 방어전에 투입되며 활약을 하고, 유엔군내에서 정예부대라는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한다. 이 시기 미 8군 지휘관으로 부임한 리지웨이 장군은 지금까지 유엔군의 붕괴를 가져온 중공군의 야간 인해전술도 우세한 화력과 부대원들의 강인한 정신력 앞에서는 실패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원주지구전투 및 ≪ 쌍터널 ≫ (1951년 2월 1일~2일), 그리고 지평리전투(1951년 2월 13~16일) 에서 프랑스 대대는 리지웨이 장군의 새로운 전략이 빛을 발하는데 많은 기여를 한다. 미군 대대들과 격리된 상황속에서 그리고 수적으로 우세한 중공군의 야간 공격에 맞서 프랑스대대는 진지를 지키는데 성공한다. 1951년 2월 말, 중공군의 겨울 대공세가 분쇄되고 유엔군은 재반격을 준비한다. 1951년 3월 초, 프랑스대대는 1037고지를 확보하기 위해 경사가 가파른 전투지에서 격렬한 전투를 치룬다. 1037고지는 춘천과 38선 으로 가기 위한 길목이자 달아나는 중공군을 추격하기 위한 길목이었다.

1951년 4월 말, 중공군은 재정비를 하고 공격을 재개한다. 중공군은 수적인 우세함, 그리고 산악지대 침투를 통해 유엔군에게 큰 패배를 안겨주려 했다. 프랑스대대의 군의관 이었던 줄 장-루이 소령은 2명의 한국인 병사를 구하려다 지뢰를 밟아 1951년 5월 8일 산화한다

1951년 5월 16일부터 23일까지 프랑스대대는 미2사단이 부채뜰 방향으로 후퇴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하지만 이 과정에서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고, 결국 중공군의 진격은 유엔군의 집중포화로 분쇄되고 만다. 1951년 5월 말, 프랑스대대는 유엔군의 재반격에 참여하고 인제지역에 있던 중공군으로부터 제3충격군을 고립시키는데 성공한다.

1951년 6월부터 개성에서의 휴전회담이 시작됨에 따라 전투의 강도도 약해지고, 유엔군은 휴전회담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공격에 투입되는 병력을 1개 대대 혹은 2개 대대로 축소한다. 체력을 회복한 중공군과 북한군은 25km에 걸쳐 은둔하기 시작한다. 진지전이 시작된 것이다. 프랑스대대는 “볼 (미군은 펀치볼이라 부름)”이라 불리는 인제북쪽의 산악지대에 배치되고 그곳에서 중공군보다 훨씬 끈질긴 북한군에 맞서 싸우게 된다.

1951년 9월, 유엔군은“볼”의 북서쪽을 내려다보는 고지를 점령하려 한다. 훗날 이 고지는, 1951년 10월 말까지 전개되며 프랑스대대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맹렬한 전투로부터 이름을 따 ≪ 단장의 능선 ≫ 이라 불리게 된다. 1951년 10월 23일, 프랑스대대는 가평 기지로 휴식을 취하러 떠나고 그곳에서 몽클라르 장군은 보레이 중령에게 지휘권을 넘긴다. 1952년 1월부터, 전쟁은 훗날 휴전선이 되는 전선을 중심으로 교착된다. 프랑스대대는 ≪ 철의 삼각지대 ≫ 에서 4개월간 주둔하며 그곳에서 맨손으로 싸우고, 정찰부대도 파견하고 적군의 매복공격을 당하기도 한다. 1952년 7월~8월, 프랑스대대는 철원 서쪽 ≪ 티본 ≫고지 방어에 투입된다.

중공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은 이 곳은 철원은 서울까지 이어지는 수많은 협곡들과 연결된 곳으로 전략적 요충지였다. 1952년 10월, 철원지역은 집중적인 화력지원을 받은 중공군의 공격 대상이 되었으나 «백마고지»의 대한민국 9사단과 비슷한 시기에 « 화살머리 고지» 에 투입되어 끈질기게 저항한 프랑스대대의 투혼으로 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1953년 1월부터 수많은 격렬한 전투에도 불구하고 전선은 전반적으로 조용해진다.“철의 삼각지 대”남쪽에 위치한 송곡지역에서의 전투도 그러했다. 프랑스대대는 1953년 1월부터 4월까지 전년도 동기간에 비해 많은 사상자를 냈다.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사실상 휴전협정이었던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한반도에서의 3년간의 살인 적인 전쟁이 막을 내린 것이다. 1953년 7월 27일, 프랑스대대는 USS General Black 호를 타고 인도차이나로 향한다.

총3421명의 프라스 지원병들이 한국전에 참전하였으며, 이중 참전인원 10분의 1에 해당하는 270명이 전사하였다. 수차례 재편성된 프랑스대대 (1953년~54 년 “한국 연대”로 명명)는 인도 차이나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알제리전에 참전후 1962년 프랑스 에서 해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