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일
- 작성자오민경
- 작성일2007-06-09 08:34:47
- 조회3529
부산 대연동의 유엔묘지 대문을 들어서면
‘정숙‘ 이라는 엄숙하고 묵직한 검은 단어를 만나게 된다.
옷깃을 여미고 신끈을 조이고 모자를 벗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죽은 자를 알아야 산자를 이해할 수 있다.
화사한 장미꽃, 패랭이꽃,
초봄에 네델란드에서 온 튜립들은
방문자들의 시선을 붙잡기에 충분하다.
꽃들과 함께 눈에 띄는 분들이 계신다.
가슴에 휘장을 두르신 어르신 몇 분들이다.
휘장을 읽어보면 ‘자원봉사자’라는 걸 알 수 있다.
연로하신 멋쟁이 이 분들을 만나는 일도 장미꽃 이상의 기쁨이다.
장미가 화사하다면 이 분들은 은은하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느낌을 주는 분들,
뭔가 도우시려는 준비된 마음씨의 소유자들,
그분들이 80을 바라보는 나이라면 믿겠는가
장미들은 정원사들의 섬세한 손끝에 몸을 맡겨
아름다운 자태를 유지하지만
이 분들은 당신들 자신을 가꾸시는 걸 알 수 있다.
강명수 자원봉사자는 79세로서 부산 바다 마라톤에서
10km 를 1시간 13분 46초에 뛰신 분이다.
박정무씨 와 최춘만씨도 젊은이 못지않은 상쾌한 인상을 주신다.
영어교사 출신인 최춘만씨는 외국인 방문자들을 접하고 돕는 일이
가슴 뿌뜻하다고 한다.
이미 에이 펙 정상회의 때 자원봉사 경력이 있으시고
유엔묘지에서 일하신지는 두어 달 되셨다고 한다.
이 멋쟁이 자원봉사자들은
나 같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며
롤 모델(role model, 본보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렇다, 우리 사회에는 롤 모델들이 귀하다.
인생을 살면서 누군가에게 롤모델이 된다는 것은 뜻이 깊다.
이 분들은 유엔묘지에 오는 외국인들을 위해
영어로 안내를 하신다.
오늘도 미국 항만 담당자들을 맞아 열심히 안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그동안 간직한 정열을 쏟는다.
인생의 깊이를 더 하시는 모습에 나는 덩달아 즐겁다.
뭔가 남을 위한 일을 한다는 것은 삶의 의미일 것이다.
그분들을 본받아 뭔가 남을 위해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새로워졌다. 뭘 할까?
마침 집에 올라오는 엘리베이터안에 안내장이 눈에 띄었다.
마을 도서관 설립에 책과 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당장 전화를 해서 참여하기로 했다.
유엔묘지에서 뵌 세 분의 자원봉사자들 때문에
용기가 생긴 것이다.
그분들은 나에게도 뭔가 보여 주시고 있다.
고마우신 분들...
(07. 6. 9 부산 용호동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