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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6.25전쟁과 유엔기념공원

  • 작성자최구식
  • 작성일2010-05-26 14:15:38
  • 조회2692

6.25전쟁과 유엔기념공원

남북분단과 대한민국정부 수립


1945년 8월 6일과 9일 미국이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 하였으며, 8월8일 기회를 엿보던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와 더불어 만주와 북한을 빠른 속도로 공격,극동아시아에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대한민국은 해방되었으나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목적으로 진주한 소련군과 승전세력으로 한국에 도착한 미군에 의해 대한민국은 38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1948년 5월 북한을 장악한 김일성의 거부로 UN의 남북한 동시 선거는 무산되고, UN의 감시하에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실시되고 8월 15일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인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그로부터 한달 뒤 9월9일, 김일성은 북한에 공산정권을 수립했으며, 6.25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모택동을 방문 남침에 대한 작전계획을 설명하고 지원을 약속 받는다.



6.25전쟁과 유엔군 참전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4시에 소련제 탱크와 자주포로 완전무장한 북한인민군에 의하여 남침 3일만에 대한민국 수도 서울은 함락되고 민주주의의 상징인 서울중앙청에는 북한 인공기가 휘날렸으며, 침략 2개월에는 부산,마산,대구,포항, 왜관을 제외한 남한의 전지역은 공산화되었다.

한마디로 당시 우리나라의 군사력으로서는 회복이 도저히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6.25전쟁발발 즉시 미국이 유엔에 한국군사원조를 요청하였으며, 3일후인 6월28일에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UN군 참전이 통과되므로써,유엔회원국중 53개국이 공산침략을 저지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들 국가중 16개국은 전투부대,5개국은 의료지원부대를 파병하였으며, 이러한 급변하는 상화하에서, 우리정부는 대전을 임시수도로 정하고 작전을 감행하였으나, 당시 미제 24시단의 방위계획서에서 가장 중요했던 평택,천안 방어선이 무너짐으로써 결국 대전까지 함락 당했다.

따라서 수 많은 피난민들과 군인들, 그리고 우리정부는 또다시 대구로 후퇴 방어선을 구축하였으나, 대구 역시 안전지역이 되지 못하므로, 이제 마지막으로 후퇴한 곳이 부산이다.

당시 경상남도 도청을 임시수도청사로 도청관사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숙소 및 집무실로 사용하였다.

우리 아군은 전략을 재정비하여 낙동강을 최후의 저지선으로 북한인민군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뒤이어 1950년 9월 15일 연합군 최고 사령관 맥아드 장군의 지휘하에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므로써, 우리 국군과 유엔군에게 과감한 반격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따라서 상륙군과 낙동강 전선을 돌파한 지상군과의 연합작전에 의하여 적의 보급로와 퇴로는 차단되고 드디어 9월 28일 잃었던 서울을 되찾게 되었으며, 우리는 이 날을 소위 9.28

서울 수복이라고 한다.

이제 승기를 잡은 우리 아군은 10월 1일 삼팔선을 넘어서 10월 19일 북한의 심장부인 평양과, 뒤이어 전략적 요충지인 원산을 탈환하므로써, 우리 민족의 숙원인 남북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북한군의 전세가 불리해 지자 기회를 엿보던 중공군이, 1950년 10월 25일 이 전쟁에 개입함으로써 전세는 또다시 역전, 남과 북은 전면전으로 확대되었으며, 따라서 수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들 중 유엔군 전사자들은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개성,인천,대전,대구,밀양,마산등 6곳의 임시 묘지에 가매장하여 두었다가, 1951년 1월 18일, 유엔군사령부에 의해서 당시 유엔묘지가 부산에 조성되므로써 그 유해를 이장하였다.


재한유엔기념공원

United Nations Memorial Cemetery in Korea


재한유엔기념묘지(United Nations Memorial Cemetery in Korea)의 명칭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친숙한 공간으로 거듭나기 위해 2001년 3월 30일 한국어 명칭을 재한유엔기념공원으로 변경하였으며, 면적은 약 36에이커(14만 8500m2)이며 , 1만여 그루의 아름다운 나무가 있다.

1951년부터 1954년까지 유엔군 유해 약 11,000여기가 안장되어 있었으나 이후 본국으로 이장해 가고 지금은 우리 한국군(KATUSA)36기를 포함해서 11개국 2,300기가 있다.

1959년 11월 6일, 우리 대한민국과 국민들은 목숨 바쳐 이 나라를 지켜주신 유엔군과 유엔의 역할에 대한 보은의 공물로써 유엔기념공원의 토지를 유엔에 영구히 무상으로 기증하였으며 따라서 그 관리는 유엔 산하 UNCURK(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에서 하였으나 1974년 UNCURK가 해체됨으로써 현재 안장자가 있는 11개국으로 구성된 유엔기념공원 국제관리위원회에서 관리를 하고 있다.

2007년 10월 24일 유엔의 날에 근대문화재로 등록된 세계 유일의 유엔기념공원은 유엔에 의해서 성지로 지정되었으며 추모관과 기념관, 상징구역, 주 묘역, 녹지지역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유와 민주주의의 대의를 위해 목숨 바치신 유엔군전몰장병의 죽음을 헛되지 않기 위해 터키, 뉴질랜드, 노르웨이, 태국, 프랑스, 영국, 호주, 영연방국, 캐나다 등 참전국에서 기증한 기념비와 1978년 한국정부가 건립한 유엔군위령탑과 2006년 한국정부의 지원으로 건립된 유엔군 전몰장병 추모명비가 있다.

이 밖에도 11개의 물 계단으로 이루어진 무명용사의 길을 조성하여 이름 없이 산화한 무명용사들의 넋을 기리고 있으며 11개의 분수, 수로 가에 늘어선 11그루의 소나무 등이 이곳에 안장된 11개국을 의미한다.

제 1기념관은 전쟁 당시 유엔군의 활약상을 담은 사진과 함께 기념유품 및 방문 기념패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한국전쟁 당시 최초로 사용되었던 유엔기도 직접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제 2기념관에는 과거 유엔군 전사자 명부의 보관 및 전시를 하던 곳으로 현재는 각 국의 유가족이 제공한 안장자의 생전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이와 함께 안장자와 관련된 기념품 및 그림 등을 상설 전시하고 있으며 새로운 테마를 기록하여 특별 전시도 이루어진다.

그리고 매일 오전 10시 상징구역에서 유엔기 게양식과 오후 4시 하강식을 거행하며 참배객 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으며 한국전쟁에 참전한 나라의 알파벳순으로 매달 둘째, 넷째 토요일 오후 2시에는 상징구역의 국기를 게양하는 의전행사가 열린다.

이와 더불어 삶의 마지막 길목에서 남편의 곁에 있고 싶다는 세프드 부인의 유언에 따라 호주유엔군 세프드씨와 휴머스톤씨, 영국의 헤론씨, 한국의 홍옥봉씨를 포함하여 모두 네 분의 합장묘가 있다.

이 밖에도 안장자의 제삿날에는 묘에 작은 국기를 꽂고 헌화가 이루어지며 인터넷 홈페이지(www.unmck.or.kr)에 추모하는 오늘의 추모용사라는 코너를 두어 이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또한 추모의 난에는 세계의 여러 나라 사람들이 추모의 글을 올리고 있다.

1964년 8월 15일 고 김중업 씨가 설계하고 유엔이 건립한 추모관에서는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의 첫 휴전회담을 시작으로 1953년 7월 27일 휴전에 이르기까지 한국전 최대의 사상자를 내어 뺏고 뺏기는 백마고지전투,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과 더불어 9월 28일 서울 수복, 평양과 원산을 거쳐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까지 진격하여 남북통일이 현실로 다가오는 듯했으나 1950년 10월 25일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으로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다시 내줄 수밖에 없었던 뼈아픈 민족의 슬픔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우리 민족의 아픔을 현실로 다가오게 하는 기록영화를 5개국 버전(영어, 일어, 중국어, 터키어, 한국어)으로 볼 수 있다.

한국전 3년 동안의 기간 중 유엔군 21개국 175만4천 4백여 명이 참전하여 무려 4만 896명이 희생되었으며 지난 60년 대한민국은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어내며 눈부신 발전을 이뤄냈다. 지금의 우리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유엔군의 이름으로 목숨을 잃은 수 많은 전사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살 수 있다는 우리민족의 운명을 예시하는 이 말을 가슴속 깊이 간직하며 6․25이전의 기류로 돌아가는 듯한 한반도의 현실을 우려하며 아쉬운 보고서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