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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6.25피난살이

  • 작성자최구식
  • 작성일2010-05-30 10:44:50
  • 조회2473

최구식(유엔기념공원 자원봉사자)

6.25피난살이

그날 대나무 밭
토굴 속에서
천년을 늙어버린
이리의 배를 안고
쫄깃쫄깃 황토로 배를 채웠다.

온 동네 장정들 줄줄이 엮어
산으로 강으로 끌려 나가고
씨암탉 남은 놈 공비가 채가고
산에서 들에서 소나무 껍질로
씹어서 씹어서 침으로 배 채웠다.

군대 간 아들 생각 잠 못 이루고
정화수 한 사발 천지신명께
가이없는 손비빔 밤을 지새면
구름 속 달님 잠에서 깨어
정화수 배 띄워 소식 전한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 반세기 그 “슬픔의 잉태”, 산고의 아픔을 몇 수의 “시”로써 풀어 보고자 한다.
지리산 주위의 공비토벌로 폭격이 있는 날은 집 뒤 대나무 밭에 파놓은 가족용 방공호에서 떨어지는 흙부스러기를 피하려고 어머님이 삿갓을 씌워주셨다. 전쟁과 삿갓 그 모습을 철모쓴 군 생활과 비교하면 입가에 웃음이 서린다. 폭격이 없는 날 낮에는 아군 폭격기가 인민군과 주민을 구별하기 쉽게 흰옷을 입고 마을 사람 전부가 강변에 모여서 생활하였고 혹시 멋을 것이 필요해 집으로 가면 책임을 맡은 이장아저씨가 야단을 쳤다. 별로 먹을 것이 없는 우리는 소나무 속껍질과 황토 찰흙으로 연명하였으며 그나마 묵은 김치에 보리밥으로 끓인 김칫국이 있는 날은 운이 좋았다. 어느 날 육이오가 끝날 무렵 배급품(미군 전투식량)속 가루커피를 입에 털어 넣고 찬물을 마셨던 우리 식구는 그 쓴맛에 놀라 혹시 쥐약이 아닌가 하고 야단법석을 떠는 바람에 초긴장이 되어 계속 물을 마셔댔고 결국은 유식한 이장 집에 가서야 커피라는 미국인의 기호식품으로 이해를 했다. 영어에 일자무식인 당시 우리가족, “비애사”의 한 토막 에피소드다. 아마 이때부터 영어는 월남의 전쟁터에서 제대 후 미하야리아 부대에서 그리고 현재 UN기념공원(UN묘지)에서 나와는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아무튼 전쟁이 끝나고 2년이나 늦게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뛸 듯이 기뻤던 그날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옛 추억

길삼에서 돌아온 우리 엄마 옵실때기
새벽달 마주보며 밤새 짠 무명 한 필
뚝 잘라 만든 바지적삼 갈아입고
자투리 이어 만든 검정 책보엔
꼬질꼬질 때 묻은 물러 받은 책
돌가루 종이로 꺼풀을 입히고
둘둘 말아 어깨에 걸쳐 메면
우린 모두 올림픽 마라톤 선수

동구 밖 정자나무 또래 녀석 모두 모여
십리 넘는 학교길 논두렁 달리고
메기 잡던 강둑 따라 고개 넘으면
병풍처럼 둘러싼 산세를 뒤로 하고
나지막이 자리 잡은 시골 학교가
오늘도 나를 손짓합니다.

황폐화된 전쟁의 후유증은 우리 식구를 도시로 몰았다. 부산 아미동 산 중턱에서 이름도 생소한 셋방살이가 시작되고 기술 하나 없는 아버지는 지게를 밑천으로 부산역과 부평동 시장에서 품팔이로, 형님은 부평동 세탁소로 직장을 가졌다. 나는 형님 현주소로 남일초등학교로 전학을 했으며 당시 보수동 책방골목 산중턱의 가교사에서 3학년이 시작됐다. 서울 토박이 담임선생님의 말씀을 수업시간에 이해하기란 “촌뜨기” 나에게는 너무나 힘겨웠으며 “뭐라꼬예”라고 대답하는 나는 교실에서 웃음거리가 되곤 했으며 물론 성적은 형편없이 곤두박질 쳤다.
당시 우리 학교는 부평동과 국제시장 주위에서 다니는 부유층과 보수동, 대청동, 영주동 등 산꼭대기 판잣집에서 생활하는 빈곤층으로 이루어졌으며 또한 가루우유, 강냉이(옥수수)가루, 밀가루, 활명수가 단골 배급품으로 우리 빈곤층들의 특식품들이었다. 굳어버린 가루우유 덩어리는 망치와 징으로 깨지 않으면 도저히 불가능하다. 따라서 일정한 크기로 나누기는 힘들었다. 수위 아저씨가 도맡아 나눠주는 우유 덩어리를 서로 비교하며 큰 덩어리를 쥔 녀석의 입가엔 미소가 서린다. 우스운 일은 잘사는 부유층 녀석들은 배급품을 호기심에 바라보다가 어쩌다 맛을 알아 버리고 우유나 강냉이 가루로 찐 점심은 인기가 있어 간혹 도시락을 바꿔먹는 일도 있었으며 우유를 깨는 현장에서 덩어리째로 먹은 우리는 설사를 만나서 혼 줄이 나는 일이 자주 일어났으나 아무튼 전쟁 구호품은 빈곤층의 식생활 해결에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리고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깡통과 두꺼운 골판지는 판잣집을 짓는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재료로 사용하였으며 어떤 집은 깡통을 펴서 지붕과 외벽 전체를 덮은 “깡통집”으로 탄생시켰으며 아마 배부른 오늘날의 사람들이 바라보았으면 훌륭한 작품으로 어느 미술관에서 관람객들의 호기심을 자극시켰을 것이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6.25당시 임시수도였던 부산 그리고 1.4후퇴 당시 육상과 해상으로부터 몰려든 피난민들의 마지막 안식처였던 부산 그 시절 피난민들의 애환과 향수가 스며있는 40계단 일대를 1950~60년대의 분위기에 맞도록 조형물을 제작하여 추억과 휴식의 장소로 꾸며 놓았다.
아무리 빨아도 배가 차지 않을 것 같아 보이는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애처롭게 바라보는 엄마와 아기모자상, 몰골이 앙상한 실직자와 지게꾼의 허탈한 표정 뒤에는 가장을 향한 가족들의 배고픔과 소망, 민족의 대동맥을 누비며 살려고 몸부림치는 수많은 피난민들을 수송했던 기차, 그리고 벤치의 한 켠에 앉아 중절모자에 아코디언을 켜고 있는 어느 낭만파의 모습이 잘 어우러져 지나는 이로 하여금 발을 멈추게 한다.
나는 이들 조형물 중에서 땅에다 지게를 내려놓고 검정 고무신을 벗어 놓은 채 한낮의 햇빛에 눈이 부셨는지 양손으로 눈을 가리며 지게에 반신을 기대어 누워있는 지게꾼의 모습에서 당시 아버지께 드렸던 말이 생각난다. ‘아버지 건축 공사장 팻말에 인부 외 접근금지’ 라고 쓰여 있는데 아버지는 일을 하시니까 그곳에 가시면 일자리가 있을 것이라고…….
내 딴에는 직장을 알선했던 일이 생각난다. 어린 소견에 힘들게 고생하셔도 생활고를 면치 못하는 우리 가족의 형편과 아마 마음속으로는 도회지에서 알아버린 촌뜨기 어린 아이의 상류층에 대한 상대적 수치심과 다 같이 일을 해도 좋은 직장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나는 법원의 수위 아저씨께 찾아가서 급사(관공서에서 심부름은 하는 아이, 사환)자리를 수십 번 부탁을 했으나 거절당했으며 중학교에 원서를 내지 않는 것을 애처롭게 여기신 담임선생님께서는 고아원에 들어가면 중학교에 무상으로 다닐 수 있다고 길을 열어 주셨으나 대답 대신 눈물만 흘렸던 어린 피난시절의 후유증이 나에겐 아직도 눈에 선하다.
수십만의 탈북자들이 아직도 배고픔과 자유를 찾아 국제 고아로 전략하고 있다. 그리고 세계의 도처에서 이념과 위정자들의 희생물로 탄생한 “전쟁”, 그 전쟁의 피해 당사자들은 우리의 이웃, 곧 또다시 내가 될 수 있다. 세계유일의 분단국가, 그리고 이 나라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우시다 전사한 UN군 2,300기가 안장되어 있는 세계 유일의 UN기념공원(UN묘지)이 있는 부산에서 전쟁의 참상과 더불어 인간이 누려야 할 자유와 존엄성을 상기 시킬 수 있는 1950년대 6.25전쟁을 테마로 하여 꾸며진 40계단을 바라보면서 전쟁의 참화에서 이제는 평화를 알리는 세계의 산실이 되길 바라며 세계인에게 교육과 체험관광의 코스로써 항구부산의 등대 불을 밝혀 줄 것을 바라며 전쟁은 전쟁일 뿐 지상의 “유토피아”는 건설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