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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26 주간조선/[잊혀져가는 전쟁, 6ㆍ25]

[잊혀져가는 전쟁, 6ㆍ25]쏙 들어간 ‘북침론’…이젠‘민족해방전쟁론’고개 들어
6ㆍ25전쟁 해석 놓고 아직도 논쟁… 북한ㆍ중국ㆍ소련의 자료 공개돼야 해결될 듯

56년 전인 1950년 6월 25일 38도선에서 시작된 6·25전쟁은 그로부터 3년1개월2일 동안 한반도에서 잔인하고 격렬하게 계속되었다. 그러나 한국 근세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라 할 6·25전쟁의 끔찍했던 기억도 세월의 흐름과 함께 어쩔 수 없이 망각(忘却)의 길을 걷고 있다.

 
▲ 1950년 6월 25일 38선을 넘어 남으로 질주하는 북한군 탱크.
 
하지만 6·25전쟁의 해석에 관해서는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면서 오히려 논쟁이 가열되는 형국이다. 특히 오랫동안 정설로 되어온 ‘북한의 남침과 그에 따른 책임론’이 일부 학자들에 의해 ‘반공주의에 입각한 반민족주의적 해석’이라는 공격을 받으며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젊은이 사이에 혼란을 생겨나고 있다. 소련이 붕괴하면서 ‘소련이 6·25 전쟁에 개입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밀문서들이 공개되었는데도 여전히 6·25전쟁을 ‘민족해방전쟁’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6·25 전쟁에 관한 초창기의 연구들은 ‘스탈린의 침략적 제국주의’에서 그 기원을 찾았다. 한마디로 ‘6·25 전쟁은 스탈린에 의해 계획되고 준비되고 주도되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스탈린이 어떤 동기에서 전쟁을 도발했는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우선 ‘압력분산설’로서, NATO의 창설로 유럽에서 가중되는 미국의 군사적 압력을 극동으로 분산시키기 위해 전쟁을 도발했다는 것이다. 소련을 배제시킨 채 미국이 일본과 단독적인 평화조약을 체결하려고 하자 이것을 견제하기 위해 소련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주장도 있다. 또 ‘팽창주의자’인 스탈린은 소련의 세력권을 확장하기 위해 언제나 허점을 노리고 있었는데, 미국이 1949년 여름 주한미군을 완전히 철수시키고 1950년 1월 국무장관 애치슨의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을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제외시킨 데다가 1950년 5월 총선거에서 남한의 보수 우익세력이 패배하자 한국을 허점으로 판단했다는 것이다.

이밖에 스탈린이 자신의 ‘세계적화전략’을 실천하기에 앞서 미국과 서방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북한의 남침으로 남한 적화에 성공함으로써 미국의 위신을 떨어뜨리고 소련의 무력을 과시함으로써 아시아 다른 지역의 공산세력을 고무시키기 위해 도발했다는 해석도 있다.

이런 주장들은 ‘스탈린의 주도로 전쟁이 발발했다’는 시각에 바탕을 두고 전개된 가설로서, 이들 모두가 명백하게 입증될 공식문서가 있는 것이 아니며 어디까지나 정황증거들에 의한 분석이라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전쟁이라는 현실은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해석하는 설명이 오히려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현상이 발생했다.
 

6·25 전쟁에 대한 연구가 한국에서는 소홀히 다뤄져 온 동안 미국에서는 이 분야에 대한 연구 성과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특히 1960년대에 이르러 격렬하게 전개된 베트남 전쟁 반대운동과 흑인 민권운동을 바탕으로 미국의 역사학계, 특히 외교사학계에 새로운 학파인 ‘수정주의 학파’가 등장하면서 이 분야 연구에 새로운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수정주의(revisionism)’란 196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펼쳐진 냉전시대사 연구의 학풍을 가리키는 전문용어이다. 이 그룹의 학자들은 마르크시즘 내지 네오마르크시즘의 유물사관에 입각, ‘미국이 19세기부터 경제적 필요성에 따라 제국주의적 대외팽창정책을 추구하게 되었고, 이런 정책이 냉전 초래의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기존의 통설에 반기를 들었다. 그리고 이들 중 일부가 미국이 참여한 주요 전쟁의 원인을 구명하는 작업을 펼쳤는데 6·25전쟁도 그 중 하나였다.

▲ 전쟁 초기, 대기 중인 국군 신병들.
 
이러한 수정주의 학설이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것은 브루스 커밍스의 논저들이 출현하고서부터였다. 이른바 ‘신좌파’로 분류되는 커밍스는 6·25 전쟁의 배경을 구명하는 연구 과정에서 미국, 한국, 일본 등지에 산재한 방대한 양의 관련 사료를 분석하여 외국학자로서는 보기 드물게 나름대로의 체계적인 한국 현대사의 인식체계를 구축함으로써 학계의 각광을 받게 되었다. 그가 이런 역작을 낼 수 있었던 요인은 1970년대 후반 한국, 미국, 영국 등으로부터 활발히 전개된 자료 공개에 힘입은 바가 컸다.

커밍스로 대표되는 수정주의자들이 주장하는 6·25 전쟁의 기원은 ‘남·북한 사이의 군비경쟁이 6·25 전쟁의 발발을 가져왔다’ ‘이승만 정부의 북진 통일론이 북한의 대남도발을 촉진했다’ ‘남한에 대한 미국의 군사공약의 강화가 북한을 자극했다’는 등의 것이었다. 그리고 전쟁도발의 책임을 은근히 미국과 남한에 전가하는 한편, 북한에 민족정통성을 부여하는가 하면 전쟁의 성격을 소련의 전쟁지원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민족해방전쟁‘으로 규정했다.

6·25 전쟁에 대한 수정주의 학설은 미국뿐 아니라 한국의 현대사 연구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1980년대 국내 서점가에는 수정주의적 입장에서 쓰인 한국 현대사 서적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미국 외교사학계에서 하나의 비주류 학풍에 불과한 수정주의가 한국에서는 199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거의 10년간 현대사 연구의 주류학풍으로 풍미했다. 많은 양의 수정주의적 논저들이 한국 국민과 한국 학계를 강타한 결과 6·25 전쟁의 기원과 성격에 대한 해석은 절대적으로 이들의 가설과 주장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 시기는 미국에서도 마르크시즘과 비판사회학이 본격적으로 흥기하던 때였다.
그러나 수정주의는 이데올로기적 편향성과 방법론적 결함 및 자료 활용의 한계 등으로 냉전 종식 이후 재평가받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여졌다. 수정주의 학파의 대표격인 커밍스의 논지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첫째 ‘꿰어 맞추기식’ 연구방법이 문제가 된다. 즉 미리 결론을 정해 두고서 이에 맞추어 가설을 세우고 사료를 선별·동원하는 방식 때문에 객관적인 성과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둘째, 이념적 편향으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 판단 등에 균형 감각이 결여돼 있다. 셋째, 6·25 전쟁의 발발 원인에 관한 학설을 제기하면서 간접적인 상황증거와 개연성에 입각한 음모론을 제시했으나, 그것을 증명할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넷째로는, 그의 연구의 장점이 수많은 문헌과 통계자료를 활용한 것인데, 이 과정에서 그가 어떤 자료는 비판 없이 사용하면서 자신의 논지에 맞지 않는 문헌자료 또는 증언은 ‘믿을 수 없다’거나 ‘조작되었을 것’이라고 일축했다. 하지만 그것들이 왜 믿을 수 없는지, 어떻게 조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특히 6·25 전쟁의 기원을 논하면서 그가 소련 및 중국 측 자료를 충분히 발굴·활용하지 못한 점은 결정적 한계점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소련 측의 기밀자료가 속속 공개되고 소련의 한반도 정책에 관한 연구가 진전됨으로써 6·25 전쟁과 관련한 그의 주장 대부분이 재평가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대체적으로 수정주의자들의 논리는 신빙성 있는 공식문서가 아니라 추측에 바탕을 둔 것이므로 논리적 근거가 약하다. 또 한 가지 지적되는 점은 그들이 처음부터 어떻게 해서든지 6·25 전쟁의 책임을 미국과 남한에 지우려고 시도한 대신 북한에는 책임이 없는 듯이 논리를 전개하려고 했다는 사실이다. 좌파적 시각에서 미국의 대외정책을 언제나 비판해 온 그들은 6·25 전쟁에 대해서도 그런 편견을 유지한 것이다.
이와 같은 수정주의적 6·25 전쟁 해석은 1990년대에 들어와 거센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으며, 그 가치도 크게 흔들리고 있다. ‘고개 숙인 수정주의’라는 표현은 이런 현상을 잘 나타내주는 말이다. 이는 그들의 6·25 전쟁관이 내포하고 있는 해석상의 오류 때문이기도 했지만, 보다 결정적으로는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공산권 사료의 대량 공개 때문이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그들 자신도 냉전의 지적 피해자인 셈이다.
 
 
최근에 이르러 국제적으로 6·25 전쟁의 기원에 대한 논쟁은 ‘소련이 지원하고 북한이 주도하여 일으킨 전쟁’이라는 쪽으로 정립되는 듯하다. 이 점은 여러 공식자료에 의해 명백하게 입증된다. 북한군의 남침은 선제적이고 전면적이었으며 사전에 주도면밀하게 계획되고 준비된 것이었다. 즉 ‘미군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며, 남로당원들이 호응 봉기할 것으로 오판한 김일성이 스탈린을 설득해 남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러 자료들을 종합해 볼 때 6·25 전쟁 도발 직전 북한에 대한 소련의 통제는 정치적·군사적 방면에서 거의 완벽했었다.
그렇다고 해서 수정주의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며, 그것을 완전히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연구들이 정립된 것도 아니다. 수정주의자들은 6·25 전쟁이 ‘남침’임을 인정하면서도 “이 전쟁은 본질적으로 인민해방전쟁이므로 북침이나 남침이냐를 가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라든가, “6·25 전쟁 때 미군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통일이 이뤄졌을 것”이라든가 하는 변형된 주장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주장에는 ‘북한이 전쟁을 시작했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엄청난 재산피해는 물론이고 수백만 명의 인명 피해를 낸 6·25 전쟁의 1차적 책임자가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고 누가 먼저 전쟁을 시작했는지를 따지지 말자는 것은,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적절한 자세가 아니다. 만일 그들이 남한과 미국에 의한 북침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를 찾아내기라도 했다면 그들은 누가 먼저 전쟁을 시작했느냐의 문제를 철저히 끝까지 따지자고 덤벼들었을 것이다. “민족해방전쟁이므로 누가 먼저 전쟁을 시작했는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그들의 주장은 북한은 민족해방전쟁을 언제라도 시작해도 좋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6·25 전쟁 때 미군을 주축으로 하는 유엔군의 참전이 없었더라면 북한에 의한 남한의 공산화가 가능했을 것이고 한반도의 공산화 통일이 성취됐을 것인데, 유엔군의 참전으로 한반도가 공산화 통일되지 않은 것에 대해 아쉬움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김일성이 이미 소련과 중국이라는 외부 요인을 끌어들여 전쟁을 시작하고서, 그에 대한 대응행위에 외부요인이 개입된 것을 잘못된 것으로 비난하는 것은 지극히 모순이다.
아직도 6·25 전쟁은 남북분단이라는 현상과 이데올로기적 요소가 그 객관적 진실 규명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또한 많은 양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관해 아직도 잘 알려지지 않은 분야가 남아 있는 큰 원인은 이 전쟁에 관한 소련과 중국 및 북한의 문헌이 거의 공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런 자료들이 공개되면 6·25 전쟁의 실상은 더욱 분명하게 밝혀질 것이다.
 
김행복 한국군사사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