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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뉴먼트 미학의 기념비적 작업

  • 작성자관리자
  • 작성일2007-07-03 16:47:53
  • 조회4291


<유엔군 위령탑 정비전 모습 2006년>


<유엔군 위령탑 정비후 2007년>
 
유엔기념공원의 녹지지역 내의 유엔군 위령탑을 설계하신 이일영선생님의 이력을 소개할까 합니다. 이선생님은 1978년 유엔군 위령탑을 설계하셨으며, 이 외 여러 국립묘지의 현충탑을 설계하신 분입니다.

이선생님의 이력과 미술평론가이신 신항섭선생님의 '모뉴먼트 미학의 기념비적 작업'이라는 글을 함께 올립니다.
유엔군 위령탑 설계를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일 영
Lee Il Young
1925 경기도 용인 출생
1947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1958-1963 현대작가전 초대작가겸 심사위원(조선일보사)
1960 4.19순국학생위령탑 전국공모에 당선(동아일보사)
1964-1973 신상회 회원겸 심사위원
1966 5인의 해병탑-포항기지(해병대 사령부)
1967 해병대 포항기지내 대통령 임시거실 정원조각(해병대 사령부)
청룡기록화-500호(해병대 사령부)
민족기록화"베티 고지의 영웅"김만술소위-500호(국방부 소장)
1968 제4회 유화 개인전-1.2.3회전은 지방-(서울신문회관)
1969 1.21사태 종로경찰서장 동상-경찰대학(치안본부)
1970 고 최규식 경부관 동상-세검정 현장(내무부)
1971-1975 토요화가회 지도운영(토요화가회)
1972 통일로비 2기-구파발.문산(경기도)
1973 타일랜드군 참전기념탑-운천(국방부)
1974 대통령 영부인 고 육영수여사 묘소조성-국립묘지(국방부)
필리핀군 참전기념탑-벽제(국방부)
1975 콜롬비아군 참전기념탑-용인석남(국방부)
춘천시 전적비-호전의 땅 자유의 수호탑-(춘천시)
강원 화천 전적비-조국과 자유를 지킨 곳-(화천군)
1976 의료지원단 참전기념탑-부산태종대-(재일거류민단본부)
안동다목적댐 준공기념탑(산업기지개발공사)
국립묘지 호국 조각 분수대-서울-(국립묘지관리소)
1977 유격부대전적비-국립묘지(국방부)
이천군 현충탑(이천군)
고리원자력발전소 준공기념탑 및 조각분수대(한국전력)
1978 UN묘지 유엔군 위령탑-부산-(외무부)
춘촌지구 전적기록화-500호(교통부)
한.미연합사령부 창설기념 대통령휘호비(한.미연합사령부)
순직선원 위령탑-부산태종대-(전국해군노조)
5.16민족상 수상기념비-구미-(금오공업고등학교)
1979-1981 서울특별시 공원녹지 자문위원(서울특별시)
1979 철원군 현충탑(철원군)
구미시 현충탑(구미시)
제주도 상징탑-제주항-(항만청)
임진강지구 전적기념탑-임진각-(교통부)
통일의 횃불 기원탑-임진각-(교통부)
청평 양수발전소 준공기념탑(한국전력주식회사)
고 박정희대통령 묘소조성-국립묘지-(국방부)
1980 해외순방-대전 국립묘지 각종 조형물 건립을 위한
각국의 국립묘지 답사-(국방부)
3.1독립선언 기념비-파고다 공원-(서울시)
국립묘지 장군묘역호상-2기-(국립묘지)
포항종합제철 준공기념탑(포항제철)
1981 경찰대학교 실내부조(치안본부)
다부동지구 전적기념탑(국방부)
1982 인천개항 100주년 기념탑 및 조각분수(인천직할시)
문화훈장 수훈-화관-(대한민국)
1983 대전국립묘지 현충탑(국방부)
1984 대전 국립묘지 대형 삼두천마군상-2기-(국방부)
인천상륙작전 기념탑(인천직할시)
육군사관학교 화랑상(육군사관학교)
1985 대전국립묘지 조각분수탑(국방부)
지하철 중앙청역사 부조-십장생 어가행차도-(지하철공사)
공군상징탑 공군사관학교(공군본부)
육군사관학교 교훈탑 벽화부조(육군사관학교)
문화훈장수훈-옥관-(대한민국)
1986 호림유격부대 전적비(고성군)
과학자4인흉상(포항공대)
1987 에너토피아 공원 상징탑과 분수(한국원자력연구소)
김포국제공항 폭발사고 희생자 추모비-임진각-(국제공항관리공원)
1988 `88올림픽 기념탑-성남공설운동장-(성남시)
620사업(계룡산대)상징탑 및 조형물일절(국방부)
설악산 향로봉 351고지 전적비(고성군)
1989 수원시 현충탑(수원시)
포항공대 조각분수대(포항공대)
공군교육사령부 상징탑-진주-(공군본부)
1990 과천시 현충탑(과천시)
해병대 군산 장한 나리지구 전적비(해병대사령부)
1991 충의 선양탑 충주 중앙 경찰학교(치안본부)
1991-1993 서울 국립묘지 현충탑 위패실(국방부)
1992 현충선양광장 현충상-15인군상-(국립묘지관리소)
해병대 진동리지구 전첩비(해병대사령부)
1993 의왕시 현충탑(의왕시)
부천시 현충탑(부천시)

모뉴먼트 미학의 기념비적 작업
신항섭(미술평론가)

인류의 역사는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그리고 부정의 연속이다. 지난 역사는 새로운 역사에 의해 지워지고,새로운 역사는 뒤에 오는 또 다른 역사에 의해 소멸하고 만다. 그러기에 역사적 사실은 시간과 함께 그 굴재성을 상실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침묵으로 그 존재성을 항변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추측케 하는 유물.유적들이다. 그 유물.유적을 만들고 일으킨 실체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통해 끊어지고 소멸된 역사의 유추.복원이 가능하다. 유사이래 국가가 형성되고 그 국가기반을 움켜쥔 절대권력이 나타나면서 역사는 많은 역사적 흔적들을 남겼다. 고대 그리스의 놀라운 유적들은 물론이거니와 이집트 피라밋,중국의 만리장성 및 진시황릉.중남미의 수많은 잉카유적 그리고 가까이는 러시아 성페테르부르그의 계획도시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절대권력이 아니면 이룩할 수 없는 역사 유적들이다. 이들 거대한 역사유적을 건설할 당시 수많은 인명이 목숨을 잃고 국민은 노동력과 세금을 착취당했음은 필연적인 일이다. 그럼에도 수십세기 또는 수세기가 지난 오늘 그 절대권력의 상징물이었던 유적들을 훌륭한 관광자원이 되어 후손들의 배를 불리우고 있으니 이 어찌 아이러니한 일이 아니겠는가.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국가는 손꼽을 정도가 됐다. 그리고 자신의 치적을 과시하려는,또는 권위를 높이려는 발상에서 비롯된 허황한 과시물을 세우는 권력자도 거의 자취를 감추고 있다. 다만 국가적인 사업이나 국민적인 지지 및 의지로서 세워지는 소규모의 기념물은 지금도 여전히 지구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의 기념물은 그야말로 어떠한 사업을 역사적인 관점에서 기리고자 하는 소박한 의미를 크게 넘지 않는다. 아울러 예술적인 가치를 고려함으로써 새로운 예술표현의 한 장르로서 인정되고 있다. 모뉴먼트는 조각과 건축이 결합된 독특한 형태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 예술적 가치는 새롭게 해석되고 조명되어야 한다. 한국의 모뉴먼트 역사는 그리 오래지 않다. `1930년대 서양조각의 선구자인 김복진,문석오 등이 기념동상을 위촉받아 제작한 것이 시초였다. 1935년에 김복진이 만든 경북 김천고등학교 설립자 최송운당 여사의 동상.그 전해에 문석오가 제작한 육영사업가 김기중선생 동상 및 평양의 사회사업가 백선행여사 동상 등이 그 초기의 사례였다(이구열:이일영과 그의 모튜먼트작품 중에서).'하지만 이래의 모뉴먼트는 흉상.반신상.등신상 등의 인물 자체에만 국한되었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동아일보사가 추진한 4.19학생의거기념탑을 공모하면서 국민적인 의지를 담은 대규모 모뉴먼트 건립이 시작되었다. 1차 공모에서 당선작을 내지 못하고 2차공모전에서 당시 승문고 미술교사로 있던 이일영의 작품이 당선되어 세간에 큰 화제를 뿌렸다. 당시 유명한 건축가 및 조각가들이 대거 응모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명의 미술교사인 화가의 작품이 당선됨으로써 자연히 화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이일영의 작품은 햇볕을 보지 못했다. 5.16쿠데타가 일어남에 따라 5.16재건 국민운동중앙회의 소관으로 넘어갔고,이 과정에서 돌연 김경승의 작품으로 바뀌어 추진되었다. 이러한 불운속에서도 자신의 작품이 쟁쟁한 작가들을 물리치고 당선되었다는 사실에 고무된 이일영은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모뉴먼트 제작에 관여하게 된다. 이일영은 4.19기념탑을 제외한 60년대 이후 각계각층에서 건립한 대표적인 모뉴먼트의 대다수를 건립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 모뉴먼트 역사의 중심부에 서 있다. 다시말하면 한국 모뉴먼트 역사의 실질적인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모뉴먼트와 관련을 맺으면서 첫 번째 제작한 작품은 해병대사령부에 건립한 `5인의 해병탑'이다. 포항기지에 세워진 이 기념조각은 본격적인 모뉴먼트작가로서의 출발을 알리는 것이었다. 물론 1962년 5.16박람회가 있은 후 훼손된 경복궁 대정원 설계 및 시공감리를 맡은 경험이 있어 대규모 모뉴먼트에 대한 감각을 갖추게된 것도 그에게는 큰 도움이 됐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그는 뛰어난 소묘력 덕분에 신문 연재소설 삽화를 담당함으로써 화재를 과시하기도 했다. 1961년 동아일보에 박계주 소설'여수'의 삽화를 맡게 된 것을 시작으로 70년대 중반까지 조선일보,한국일보,서울신문등의 연재소설 삽화작가로서 활약하였다. 그의 삽화는 단순한 소설의 내용을 따라가는 데 그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타고난 조형적인 감각으로 회화성을 고려한 독창적인 이미지의 삽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날협하면서도 힘차고 명료한 선획을 구사하면서 형태를 만들어가는 그의 삽화는 시각적인 즐거움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그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수학한 후 교직생활을 시작했고,창작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1958년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현대작가초대전에 초대될만큼 이미 역량있는 작가로서 주목받고 있었다. 그는 동전시회에서 심사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 화단에 유행하기 시작한 비구상 계열의 앵포르멜에 경도되어 뜨거운 추상작업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그는 견실한 사실적인 묘사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추상작업을 하는 와중에서도 기록화에 관심을 가져 1961년 김구선생 기록화를 제작한 것을 시작으로 1967년 해병대사령부에 설치한 500호 대작`청룡기록화',민족기록화 `베티고지의 영웅 김만술 소위'(1000호),`고 이인호 소령의 대형 초상화(300호)',`해병대공관벽화(1500호)'등을 그렸다. 그리고 1978년도에도 춘천지구 및 왜관지구전적 기록화(각500호)를 제작했다. 이같은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모뉴먼트를 회화의 연장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가 조각가로서가 아닌 화가로서 출발했다는 것은 모뉴먼트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조각적인,그리고 건축적인 이미지에 국한하지 않는 회화적인 조형성까지를 고려한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중 상당수가 부조작업을 병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자신의 회화적인 시각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그는 모뉴먼트에 대해 `입체공간에서의 회화작업'이라는 독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즉 인체조각을 하는 경우에도 회화적인 조형성을 의식하고 있다. 평면공간에서 입체공간으로 공간개념만 바뀌었을 뿐 조형성 자체는 회화적인 표현성을 따른다는 얘기다. 그래서일까,그의 기념조상은 표현성이 풍부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적인 구도보다는 동적인 구도,정적인 포즈보다는 동적인 포즈를 선호하는 데서도 이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이제까지 제작한 모뉴먼트는 대략 100여건에 이른다. 그 숫자만큼이나 모뉴먼트의 형태 및 내용 그리고 형식이 다양하다. 그처럼 다양한 작품중에서도 대종을 이루는 것은 전국 각처에 산재한 전적비와 산업시설 준공기념탑,그리고 각 지방의 현충탑이다. 이중에서 전적비와 산업시설 준공기념탑 등은 내용적으로도 풍부할 뿐만아니라 시각적인 면에서도 짐짓 화려하다. 여기서 말하는 화려함이란 인물상에 부여되고 있는 다이나막하고 극적인 포즈를 가리킨다. 전적비의 경우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내용이므로 자연히 극적인 요소를 내포하게 된다. 하지만 내용성에 치우치다보면 조각으로서의 긴장감이 무시될 우려가 있다. 따라서 그는 이 두가지 문제를 영두에 두고 기념조상의 성격에 맞는 작품적 가치를 부여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무엇보다도 전쟁이라는 처절한 상황을 의식하면서 거기에 숨겨져 있는 휴머니즘을 표현적인 가치로 부각시키는 데서 그의 모뉴먼트가 기지고 있는 특징을 엿볼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필승의 굳센의지를 포즈속에 부각시키는 것이다. 임전무퇴 필승의 강인한 군인 정신을 시각화함으로써 전저비로서의 성격에 충실하는 것이다. 모뉴먼트의 기본적인 개념은 역사성.기록성.상징성.장소성.내용성 등을 전제로 한다. 이같은 기본적인 전제조건을 충족시키면서 한편으로는 예술적인 가치를 부여해야만 후세에 길이남을 모뉴먼트가 될 수 있다. 그의 모뉴먼트는 이와같은 기본적인 조형개념에 충실하고 있다. 하지만 예술성이란 문제에서는 모뉴먼트의 주관처의 요구사항을 전면적으로 배제할 수 없는 현실적인 여건으로 말미암아 작가적인 창의성을 충분히 발휘하기 어렵다는 점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때로는 스스로 만족할 만한 작품이 나오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의 작품 중에서 예술적인 성과 면에서 가장 성공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은 1975년에 건립된 콜럼비아 참전기념비이다. 국방부의 주관으로 건립된 이 기념비는 인천 석남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조형개념은 다음과 같다. `콜럼부스가 아메리카 탐험을 떠날 때의 범선 모양을 조형화하여 콜럼비아의 상징을 적절히 표현토록 하였다. 그리고 활짝펴진 돛에 해당하는 탑신 좌우에는 빛나는 잉카문명을 조각하였고,선두에는 미지의 대륙을 찾아나선 당시의 콜럼부스처럼 한국전쟁의 참전에서도 그들은 정의와 평화를 찾아나선 용사의 상을 반추상으로 처리했다.' 이 기념비는 콜럼비아군의 한국전쟁 참전에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콜럼비아의 역사를 조각의 내용에 반영함으로써 이국적인 정취를 잘 표현하고 있다. 특히 탑신의 양쪽 면에 기하학적인 조형성을 강조한 부조로 콜럼비아의 과거와 현재를 상징적인 문체로 표현함으로써 예술적인 가치를 높히고 있다. 또한 전면에 배치한 두 명의 인물상도 사실성을 탈피하여 개략적인 형테미의 독특한 인체해석을 통해 역시 창작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작품은 단순한 모뉴먼트의 성격을 넘어 작가적인 창의성이 반영된 예술성이 높은 작품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전투적인 상황,군인의 용맹성을 내세우는 일반적인 참전기념지의 성격을 극복함으로써 작가적인 창의성이 충분히 반영될 수 있었으리라. 1981년 12월 경기도 오산읍 죽미고개에 세워진 유엔군초전기념비도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다. 옥천석으로 쌓아올린 벽면구조의 독특한 탑신을 가진 이 작품은 한국전에 첫 투입된 스미스부대의 전투장면을 묘사하고 있는데 5명의 군인상이 만들어내는 다이나믹한 포즈를 통해 군인의 감투성과 격전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격전의 현장에 세워진 이 비는 침략군을 방어한 최초의 성벽임을 겹겹의 높은 탑신으로 나타내게 하고,단순한 탑신을 현대감각의 구성으로 균형있게 배치하여 시각의 차이에 따라 변화하는 조형미를 갖도록 하였다. 탑신과 탑신 사이를 치장벽돌을 쌓아연결하여 소재의 다양화를 시도해 보았으며,좌대 위에는 5인의 청동상으로 당시의 치열했던 전투상황을 동적이고 박진감있게 실현시켜 그들의 공로를 상징케 하였다'이같은 작품의 개요를 볼 때 그는 이 기념비의 역사적 상황의 재현에 충실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사실에 입각하면서도 예술성을 고려한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적과 조우하는 순간의 긴장을 격렬한 신체적 동작으로 표현함으로써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5인의 군인들의 다이나믹한 동작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끌고가는 서로 엇갈려 겹쳐지는 탑신의 견고한 이미지가 마치 연극무대와 같은 느낌을 전달하고 있다. 그렇다. 그는 이 작품에서 조형적인 리얼리티와 함께 드라마틱한 현장성을 강조함으로써 입체적인 공간감을 극대화시키는데 성공하고 있다. 이처럼 그의 기념조형물은 역사적인 사실의 재현성을 뛰어넘는 인간적인 드라마를 표현하는데서 작품적인 개성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 1980년 기공식을 가진 이래 4년여동안 계속된 대전국립묘지 현충탑은 그 자신의 필생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을만큼 대규모의 모뉴먼트이다. 이 작품의 외형은 길이 110M,탑높이 43M에다 기념상 4.5M 3점과 탑중앙상 8.5M의 규모이다. 뿐만아니라 6MX99.8M의 초대형 부조가 설치되고,내부는 88평의 위패실이 자리하고 있다. 위패실에도 중심부에 3명의 선녀가 하나가된 화강석의 비천상 입상이 놓여있으며 천장에는 선녀들의 비천상이 양각화되어있다. 이 현충탑은 워낙 대형이다보니 그 자신의 경험과 작가적 역량을 총집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외부의 탑신 하단부에 설치된 화강석의 군상들과 탑의 날개에 해당하는 좌,우,뒷쪽에 배치된 청동군상.그리고 벽면의 군상부조가 한데 어우러져 뿜어내는 역동적인 장면은 그대로 한편의 대하드라마를 보는 듯 장관이다. 기본적으로 세 방향의 기단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한국 모뉴먼트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 그러기에 시각적인 감동도 클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은 국립묘지내에 위치하는 충혼탑으로서의 성격상 `애국.애족.호국'을 상징할 뿐만아니라 `자유.평화.약진.번영'이라는 우리 민족의 미래상까지를 포괄적으로 표현해야 하는탓에 예술적인 창의성보다는 역사성에 충실하였다. 그러기에 리얼리즘 기법에 바탕을 둔 내용중심의 군상이 전개되는 형식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산화한 호국영령들이 잠든 곳으로서 경건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부드럽고 수려하게 조성하여 국민들이 자주 찾아 가까이함으로써 참배도 하고 역사를 되새길 수 있게 하여 호국의 위상을 고취토록 하였다.'그의 작품중에서 또 하나 독특한 형식미를 자랑하는 것은 부천시 현충탑이다. 이 작품은 높이 16.5M의 크기인데 무엇보다도 탑신을 정육면체의 단일 괴체로 하였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더구나 탑신 상단부에 군상의 인물들을 탑신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덩어리로 연결,조형적인 통일성을 부여하고 있다. 마치 승천하듯 불꽃과 같은 형태로 이루어진 군상의 부조는 회화적인 구성의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군상의 일부가 탑신의 부조에서 벗어나 홀연 하늘로 도약하듯 입체화한 것도 창의력의 독자성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모뉴먼트는 역사성에 대한 서술임과 동시에 현재를 미래로 연결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후세에까지 존재가치를 살리자면 필경 예술성을 부여하지 않으면 안된다. 예술적인 향기가 높은 모뉴먼트라면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형 모뉴먼트는 작가 한 사람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다. 인물조상에서부터 탑신을 만드는 일,릴리프 벽화등에 이르기까지 미술과 건축이 일체가 되어야 하는 종합예술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게 된다. 그가 세운 100여점의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는 제작하는 과정에는 조상부문만 하더라도 유능한 조각가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기본적인 계획안과 총괄적인 지도가 그의 몫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쩌면 국내 중요 모뉴먼트 대다수를 그가 맡을 수 있었던 것은 풍부한 경험과 인적 구성면에서 남다른 노하우를 기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그 스스로가 만족해할 수 없는 작품도 적지 않은 것은 작가적인 창의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는 현실적인 여러 가지 제약조건 탓이라고 보아야 한다. 모뉴먼트는 그 고유의 성격상 완전한 창작성을 실현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인지 모른다. 적어도 분명한 어떤 목적에 의해 만들어지는 까닭이다. 물론 목적이 선행한다고해서 반드시 창작성 또는 예술성이 약화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스스로의 표현충동에 의한 순수한 창작활동이 아닌,특별한 목적을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에 창작성이란 문제에서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일까.그는 처음에 화가로서 출발하였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다. 때때로 기록화를 그려온 것은 화가로서의 꿈을 버리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모뉴먼트 작가로서 성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화가이기를 고집하는 까닭은 순수한 창작성을 불태울 수 없었다는 데 연유한다. 그는 늦게나마 다시 붓을 잡고 있다. 그 자신으로서는 어쩌면 이제야말로 나만을 위한 창작의 공간을 갖게 되었다는 안도감에 사로잡히고 있는지 모른다. 30여년간 화가로서의 개인적인 창작욕구를 억제하면서 한국 모뉴먼트의 이정표를 세운 그로서는 전혀 뜻밖의 일이라고 여길 수도 있으나,창작의 세계란 역시 창의성을 제한받지 않는 절대적인 자유 및 개성의 실현임을 믿는다면 납득하기 어렵지 않다. 오직 모뉴먼트 그 자체에만 열정을 쏟아왔기에 자신의 작업에 대한 세간의 시시비비에도 눈 한번 돌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투철한 자기신념 및 확신의 결과인 것이다. 모뉴먼트라는 새로운 조형개념을 이 땅에 안착시킨 주역으로서,역사적인 한 공간을 마련했다는 자부심을 만끽할 시점에서 그는 새로운 출발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순수한 한 사람으로서의 화가의 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