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으로 바로가기

정보마당

평화와 자유를 사랑하는 세계인들 누구나
유엔참전용사의 희생에 감사하고 추모할 수 있습니다.

언론보도

유엔기념공원과 관련한 신문, 잡지 등의 "언론 보도기사 모음" 입니다.

2022.11.01 국제신문/ “대가족 부양하러 참전한 삼촌…한국, 강대국 성장 기여 뿌듯”

 

“대가족 부양하러 참전한 삼촌…한국, 강대국 성장 기여 뿌듯”

UN공원에 잠든 용사들…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8> 호주군 故 빈센트 힐리 씨

 

 

- 퀸즐랜드주 브리즈번 출신

- 9명의 동생 가장처럼 돌봐
- 한국전 참전 1951년 3월 전사

- 10년 동안 뱃삯 모은 할머니
- 1만5000㎞ 거리 아들묘 찾아
- 같은 처지 韓여성과 친구 돼

- 조카 ‘부산으로 가는 길’ 펴내
- 숭고한 희생·애틋한 모정 기록
- “삼촌묘 참배한 날 매우 감동

- 옛날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고 빈센트 힐리 씨

 

“삼촌의 가족은 누군가 휘파람을 불며 집 앞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아야 했어요. 삼촌에게 뭔가 잘못된 실수가 있었던 것 아닌지 기도하기도 했죠. 삼촌이 이야기와 선물로 가득한 가방을 들고 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에요.”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호주군 고 빈센트 힐리 씨의 조카 루이스 에반스(여·59) 씨가 삼촌 가족에게 상처로 가득했던 지난 날의 이야기를 취재진에게 전했다. 그러나 삼촌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한국을 민주주의 국가로 만들고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소중한 인연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 아버지 대신한 장남

 

에반스 씨가 전한 이 이야기는 호주의 평범한 청년이었던 삼촌이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부터 시작된다. 호주 퀸즐랜드주 브리즈번에 자리 잡은 삼촌 가족은 대가족이었다. 10명의 자식 중 삼촌이 장남이었다. 당시 삼촌의 아버지가 집을 대부분 비운 상태였기 때문에 삼촌은 다른 9명의 형제자매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삼촌은 9명의 동생을 사랑하고 보호했던 만큼 존경받았다. 삼촌은 군대에 입대한 뒤 월급을 보내 대가족을 부양하는 데 보탰다.


그러던 어느 날 삼촌은 한국전쟁 참전을 결심했다. 삼촌은 가장 친한 친구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전쟁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가는 게 좋다’고 말했다. 삼촌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으로 향했고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빈센트 힐리 씨가 어머니 델마 힐리 씨와 함께 찍은 사진.

 

삼촌은 1951년 1월 11일 쓴 마지막 편지를 가족에게 보냈다. 이 편지에서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여기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도 나는 여전히 싸우고 있어요. 새해가 찾아오고 우리는 계속 움직이고 있고 곧 자리를 잡을 거예요. 며칠 전 눈이 많이 내리기도 했어요. 지금 몹시 추워요. 지구상에 이곳보다 더 추운 곳은 없을 거예요’라고 적었다.


그러나 그해 3월 10일 호주 집으로 가슴 아픈 소식을 담은 전보 한 통이 도착했다. 당시 삼촌의 어머니는 집에서 재봉틀로 일하고 있었는데, 전보를 전하는 소년이 집 현관문을 두드렸다. 삼촌의 여동생 모니카가 문으로 달려가 빨간 글씨가 적힌 전보를 받았다. 모니카를 통해 이를 전달 받은 삼촌의 어머니는 결국 쓰러졌다. 전보에는 삼촌이 3일 전 전사했다는 내용이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삼촌은 1951년 3월 7일 한 전장에서 폭탄 파편을 머리에 맞아 전사했다. 

 

부산 남구 유엔기념공원의 아들 묘지를 찾아 기도하는 힐리 씨의 모습.

 

■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모성애

 

이후 삼촌 가족의 삶에 삼촌의 빈자리는 여전했다. 1954년 10월 삼촌이 속했던 호주 군부대가 돌아왔을 때 삼촌의 여동생 제랄딘은 환영 퍼레이드를 보기 위해 시내로 나갔다. 제랄딘은 행진하는 모든 병사의 얼굴을 훑었다. 자신의 오빠가 전사해 다시는 집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기적을 기원하며 금발인 오빠를 끝까지 찾았다.

 

 

삼촌의 어머니이자 에반스 씨의 할머니인 고 델마 힐리 씨는 부산 남구에 있는 유엔기념공원 내 아들의 묘지를 방문할 것이라 맹세하기도 했다. 가난했던 할머니는 삼촌이 전사한 뒤 10년간 파인애플 공장에서 일하는 등 꾸준히 한 푼 두 푼 돈을 모았다. 뱃삯 등 충분한 여행 경비를 모은 할머니는 1961년 1만5000㎞의 거리를 달려 부산으로 향했다. 중년의 호주 여성이 전후 피폐해진 한국을 방문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할머니는 부산에 도착해 삼촌의 묘지에서 삼촌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전했다. 할머니의 평생 소원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할머니의 여행은 또 다른 인연의 시작이었다. 당시 할머니의 용감했던 여정을 서울의 한 언론사가 기사로 다뤘다. 한국전쟁에서 남편을 잃고 서울에서 살고 있던 고 김창근 여사가 이 소식을 접했고, 이후 할머니와 김 여사는 둘도 없는 펜팔 친구가 됐다. 김 여사는 삼촌의 기일이면 할머니 대신 부산으로 향해 삼촌의 묘지에서 기도하고 꽃을 놓는 등 삼촌의 한국 어머니가 되기도 했다. 두 할머니의 인연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에반스 씨는 김 여사의 손녀가 호주에 거주한다는 소식을 접했고 대를 이어 할머니가 맺어준 귀중한 인연을 지켜나가고 있다.

 

루이스 에반스 씨가 삼촌의 묘지를 찾아 헌화하는 모습. 루이스 에반스 씨 제공

 

■기록된 삼촌과 할머니의 이야기 

 

에반스 씨는 어릴 적 가족으로부터 이런 삼촌의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할머니가 삼촌의 묘지를 찾기 위해 부산으로 향했던 이야기도 함께 들었다. 그가 할머니의 여행 일기를 발견하면서 2년간 연구 끝에 할머니의 부산 여정 등을 엮어 책 ‘부산으로 가는 길(passage to pusan)’을 2016년 펴내기도 했다. 이후 주호주 한국문화원이 이 책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도 했다.


그는 부산을 방문해 삼촌을 추모했던 때를 설명했다. “유엔기념공원에 있는 삼촌의 묘지에 무릎을 꿇은 것은 매우 감동적인 날이었다. 60년 전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곳은 한국전쟁 때 숨진 호주인 281명을 비롯해 유엔군 2300여 명의 안식처다. 이곳은 그들의 봉사와 희생이 기념되고 영광스러우며 아름답고 평화로운 장소다.”

한국전쟁에서 희생된 삼촌에게 하고 싶은 말도 전했다. “삼촌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삼촌은 공산주의 침략을 무찌르기 위해 결성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승인한 군대의 일원이었다. 이런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은 신생 민주주의 국가가 됐고 세계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어 “전쟁에서 맺어졌고 자유와 우정으로 유지되는 한국과 호주의 유대가 영원히 지속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