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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3개국 묘지

  • 작성자admin
  • 작성일2007-05-21 15:43:19
  • 조회3877

월간조선 2005 5월호

유럽 3개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 묘지 巡禮

<조각공원 같은 파리의 묘지죽어서도 검소한 독일인들>

살아가면서도 죽음을 인식하는 사람은 천박하지 않다. 죽음을 잊고 멀리하는 사람은 이미 주검과 다름없다. 유럽의 묘지는 삶과 죽음이 만나는 공간이었다. 산 사람의 영혼과 죽은 이의 영혼이 기도를 통해 대화를 나누는 곳이었다.


·사진 : 자유기고가〈freisinn@empal.com

프랑스-조각미술

세계 최초의 公設묘지 「페르 라셰즈」

눈부신 햇살을 맞으며 메닐몽탕 길을 걸었다. 2월의 파리는 예년 이맘때와 달리 따스했다. 간혹 눈발이 흩날리기도 했다. 비가 내릴 때도 있었다. 파리에서는 좀처럼 해를 보기 힘든데, 웬일로 햇살이 비추었다. 햇살 사이로 다시 눈발이 흩날렸다.

호텔이 있는 갈리에니 역에서 「페르 라셰즈」 묘지까지는 지하철로 세 정거장 거리였다
.

페르 라셰즈 역에서 묘지 정문까지 이어진 메닐몽탕 길 왼편으로 오래된 담이 보였다. 담 바깥쪽에는 어깨 높이의 철조망이 있는데, 담과 철조망 사이에는 사람 키보다 큰 다양한 나무들이 심어져 있었다. 묘지는 어디 있으며, 이 높은 담은 무엇일까? 그렇게 5분 정도 걸었을까. 곧게 이어지던 담이 안쪽으로 휘어지더니 자연스레 작은 광장을 만들어 놓았다
.

천사날개를 단 모래시계가 浮彫(부조)된 기둥이 보였다. 하얀 대리석 기둥 사이로 하얗게 썩어 가는 나무 문이 열려 있었다. 파리에서 가장 큰 페르 라셰즈 묘지의 정문이었다. 유럽에서 처음 만난 묘지를 바라보았다. 사랑스러웠다
.

50만 명의 유해 안치

푸른 제복을 입은 묘지 관리인은 친절히 답해 주었다.

『페리 라셰즈는 세계 최초의 公設墓地(공설묘지)입니다. 1804년에 문을 연 이래 총 10여만 개의 묘소에 50만 명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죠』


어떻게 50만 명의 유해를 수용하는 게 가능하죠.

『대개가 가족묘의 형태로 합장이 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연간 파리市에서 사망하는 사람의 20% 정도가 화장이 되고 나머지는 매장을 하죠』


매장에 따른 묘지난은 일어나지 않습니까.

『기본적으로 가족묘이며, 대다수 매장을 한다 해도 1기당 분묘면적이 0.5평 이하입니다. 게다가 시한부 묘지제도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파리市는 시민들에게 묘지를 임대했다가 기간이 끝난 후엔 시신을 납골당에 안치시키도록 한다.

페르 라셰즈 묘지의 정문에서 바라본 풍경은 묘지가 아닌 「사랑」이었다. 진정한 사랑은 처음과 끝이 없고 물처럼 흘러갈 뿐이다. 그러한 사랑의 속성을 파리의 묘지는 간직하고 있었다. 삶과 죽음을 나누는 것도 사랑이요, 하나로 만드는 것도 사랑이다. 파리는 죽은 자들조차 사랑하는 도시였다
.

쇼팽의 무덤에 핀 하얀 꽃

한 걸음 한 걸음 걷기 시작했다. 肉身(육신)은 묘지 관리인에게 맡겨두고 靈魂(영혼)만 걸어가는 느낌이었다. 검은 돌이 깔려 있는 길 양편으로 무덤들이 있었다. 흩날리던 눈발이 무덤 위에 제법 쌓여 있었다. 앙상하게 나뭇가지만 드러낸 나무 아래 무덤들은 커다란 돌처럼 박혀 있었다. 가까이 다가갔다.

굳이 묘비에 적힌 글을 읽어 보지 않아도 묻힌 이의 삶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한 죽은 여인의 입술에 입맞춤하려는 아이의 조각, 고개를 숙인 채 팔로 턱을 괴고 있는 아기 천사, 기도하다 잠든 여인 등 화강암으로 투박하게 만들어진 조각상에서부터 대리석·청동에 이르기까지 재료 또한 다양하다. 어느 것 하나 비슷한 형태의 무덤은 없었다. 순간 조각미술관에 온 듯한 착각에 빠졌다
.

최근에 만들어진 무덤들은 검은색·하얀색·붉은색 화강암으로 단순미를 강조했다. 유대인의 무덤들은 형태가 비슷했는데, 무엇보다 石質(석질)이 고급스러웠다. 금박을 한 다윗의 별과 히브리語로 된 文句(문구), 화려한 꽃 장식. 그들의 묘지는 현세주의자의 그것이었다. 수수한 파리지엔 무덤의 예술 조각품들이 더 아름다웠다
.

쇼팽의 무덤에는 하얀 꽃이 피어 있었다. 쇼팽은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프랑스人이었고, 어머니는 폴란드人이었다. 그의 나이 스무 살에 아버지의 고향인 파리에 처음 오게 됐다. 그때 폴란드에서는 혁명이 일어나지만 러시아軍에 의해 진압을 당한다. 스물두 살의 나이에 파리에서 최초의 연주회를 갖고, 서른아홉 살의 나이에 파리에서 눈을 감는다
.

쇼팽의 무덤은 페르 라셰즈 묘지의 11구역에 있다. 11구역은 벨리니·케루비니와 같이 주로 음악가들이 묻혀 있는 곳이다. 그중에서도 단연 심장 없는 쇼팽의 무덤이 가장 눈부시다
.

약간 노란 빛을 발하는 하얀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묘비와 조각상은 보는 이로 하여금 처연함을 느끼게 했다. 한 여인이 악기처럼 보이는 물건을 한 손으로 겨우 든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진 걸로 봐서 잠든 것처럼 보였다. 축 늘어진 다른 한 손의 검지는 부러져 있었다. 조각상을 받치고 있는 묘비에는 쇼팽의 측면 浮彫가 있었다. 쇼팽의 예민하고 섬세한 예술적 기질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었다
.

짐 모리슨의 무덤

페르 라셰즈 묘지에는 짐 모리슨(6구역), 엘뤼아르(97구역), 프루스트(85구역), 발자크(48구역), 몰리에르(25구역), 모딜리아니(96구역), 들라크루아(49구역), 비제(68구역) 등 위대한 작가·음악가·화가들이 묻혀 있다. 대부분 다른 나라에서 태어난 예술가들이 파리에 잠들었다. 그들은 어쩌다 여기에 흘러든 것일까.

그룹 「도어즈」의 리드보컬 짐 모리슨의 무덤은 무릎 정도 높이의 철제 난간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날도 여러 나라에서 몰려든 젊은이들로 북적거렸다. 『무의미한 것들이야말로 자유를 향한 진정한 길』이라고 외쳤던 짐 모리슨. 가까이 다가가면 무덤마저 나비가 되어 날아갈까 하는 마음에 더 이상 다가설 수 없었다
.

마르셀 프루스트의 무덤으로 가는 오솔길에서 길을 잃었다. 그때 한 가족을 만났다. 할아버지·할머니에서부터 손자·손녀까지 일가족이 한 무덤의 胸像(흉상) 앞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알랭 카르덱이라는 降神術師(강신술사)의 무덤이었다. 기도를 마친 가족들은 한 사람씩 앞으로 나와 흉상의 어깨에 손을 얹고 중얼거렸다. 필자는 가족 중 한 사람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

사랑스러운 파리의 묘지들

忌日(기일)이신가 보죠.

『예, 오늘이 아버지의 기일입니다』


평소에 자주 오십니까.

『예, 오늘은 기일이라 온 가족이 시간을 내서 찾아왔죠. 평소에도 한 달에 한두 번은 가족마다 돌아가며 무덤을 돌봅니다』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프루스트의 무덤을 많은 꽃다발을 보고서야 찾을 수 있었다. 프루스트는 과거의 시간이 현재를 통해 영원에까지 도달함을 그의 소설들을 통해 이야기했다. 그에 관한 사소한 기억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페르 라셰즈 묘지의 하얀 정문을 나와 다시 메닐몽탕 길을 걸었다. 청동 조각상이 눈에 들어왔다. 한 사람이 서서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데, 그 기도하며 고개 숙인 방향이 묘지 밖 세상이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은 어떠할까? 혹은 산 자가 죽은 자에게서 기도 받는 마음은 어떠할까? 누가 산 자이며, 누가 죽은 자인가? 사랑스럽게만 보이는 파리의 묘지였다
.

독일-소박한 숲 속 庭園

숲속의 묘지들

죽음을 깨닫지 못한 삶은 어떠할까?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는 에어프랑스 여객기 안에서 한국에서부터 묻어 둔 질문이 생각났다.

프랑크푸르트 공항 입국장은 혼잡했다. 新청사가 지어진 다음부터 舊청사와의 연계가 원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독일內에서는 統一(통일) 이후 首都(수도)인 베를린으로 국제공항을 옮기자는 의견이 끊임 없이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프랑크푸르트市는 프랑크푸르트 공항 확장 공사로 대응하고 있다
.

이체(IC: 도시 간 특급열차)를 타고 20분여 만에 마인츠에 도착했다. 프랑크푸르트의 번잡스러움보다는 마인츠의 소박함을 택했다
.

이곳은 「근대적 인쇄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구텐베르크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마인츠 중앙역에서 버스로 5분 거리인 마인츠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대학교로 향했다. 그곳에 미리 「가스트하우스」(외부 손님용 기숙사)를 예약해 놓았다. 대부분의 독일 대학교에서는 이런 식으로 대학을 방문하는 외부 손님을 위해 기숙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마인츠 묘지로 향했다. 지도상에는 마인츠 대학교 옆 구역이라 했는데, 파리에서 보았던 높은 담은 어디에도 없었다. 지나가던 학생에게 물었다. 학생은 웃으며 『묘지는 바로 저기입니다』라며 손으로 바로 앞의 숲을 가리켰다. 묘지는 마인츠 대학교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

『독일사람들이 죽는다고 달라지겠습니까』

묘지의 정문은 기둥 장식이 특이했다. 양쪽 기둥 끝에 몸은 사자인 두 개의 女神像(여신상)이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할로!』라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디트리히氏였다. 디트리히 단케르트(53)氏는 마인츠 시내에서 장묘사업을 한다. 마인츠 대학교 교수 소개로 알게 된 디트리히氏는 『독일의 묘지는 기본적으로 소박합니다. 살아 있을 때도 검소한 독일인들이 죽는다고 달라지겠습니까』라며 웃었다.

묘의 크기가 프랑스의 것보다 작아 보입니다
.

『그럼요. 독일은 프랑스처럼 화려한 조각상을 세우지 않습니다. 대신 작은 정원을 꾸미죠』


파리 「페르 라셰즈 묘지」에서는 조각상이 없는 무덤을 보기 어려웠다. 형태도 다양했다. 독일 마인츠 묘지의 경우, 조각상은 한 구역에 한두 개 정도였다. 묘지는 똑같은 모양이다. 직사각형 묘비나 십자가만 세우고 네 개의 護石(호석)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런 다음, 그 안에 검은 흙이나 나무 껍질, 나뭇잎 등을 도톰하게 넣는다. 그리고 꽃·나무···장신구 등을 이용해 작은 정원을 만든다.

프랑스는 조각상이나 묘비의 크기 제한이 없기 때문에 유가족이 원하는 대로 제작할 수 있다. 물론 크기나 차지하는 면적에 따라 가격이 다르다. 그러나 독일의 묘비와 무덤은 크기가 제한되어 있다
.

한국인의 경우, 주로 명절이나 기념일에 묘를
찾습니다.

『대개 지역마다 작은 묘지들이 흩어져 있기 때문에 집에서 가까운 곳에 묘지를 쓰고, 자주 찾아갑니다』


마인츠의 묘지에는 곳곳마다 우물이 있다. 우물 옆에는 물 주는 기구들이 놓여 있다. 참배객들이 知人(지인)의 무덤에 심어진 꽃과 나무를 돌보기 위한 것이다. 파리의 묘지에는 독일처럼 우물이 있기는 하나 이것은 조각상이나 묘소를 정리하기 위한 용도로 쓰인다.

파리의 묘지 우물은 시각에 불쾌감을 주는 것을 씻어 내는 데 사용된다. 그리고 그 물은 폐수가 되어 하수도를 흐른다. 하지만 마인츠의 묘지 우물은 땅과 숲을 살린다
.

파리지엔은 무덤을 참배할 때 꽃 한 송이나 꽃다발을 돌덮개 위에 올려놓는다. 이것 역시 보는 것에 의미를 두는 행위이다. 반면 마인츠 시민들은 촛불에 불을 붙이고, 손으로 흙을 고른다. 그리고 화초에 물을 준다
.

「우리의 죽음」

디트리히氏는 언덕 위에 있는 군인들의 묘로 필자를 안내했다. 언덕 끝에 건물 한 채가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건물 상단에 독일군을 상징하는 검은 십자가와 「우리의 죽음」이라는 뜻의 독일어가 눈에 들어왔다.

추모관 안으로 들어가 보니 하얀 돌을 거칠게 조각한 동상이 있었다. 아래에는 두 번의 세계대전이 일어났던 기간을 뜻하는 「1914-1918, 1939-1945」을 적어 놓았다. 1차 세계대전 때 독일은 200만 명의 戰死者와 400만 명 이상의 戰傷者를 냈다. 2차 세계대전 때 독일 측의 인명피해는 650만 명에 이르렀다
.

동상은 투박했다. 벌거벗은 채 서 있는 한 남자가 고개와 상체를 약간 숙이고 있었다. 죄수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몸은 근육질로 강인해 보였다. 두 주먹을 꼭 쥔 채 팔은 서로 엇갈려 가슴에 놓여 있다. 무언가를 참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니 지금이라도 당장 팔을 뻗으려는 모습이었다
.

디트리히氏는 독일군 묘역을 둘러보고 언덕을 함께 내려가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독일군의 죽음이 아닌, 「우리의 죽음」이라 그랬던 것일까. 바닥을 보며 걸어가다 오른쪽을 보니 잡초가 뒤엉킨 철조망이었다
.

유대인 묘지

이 철조망은 뭡니까.

『유대인 묘지와 구분하기 위한 철조망입니다』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는 유대인과 파리지엔의 무덤이 함께 있었다. 그러나 이곳 독일의 마인츠 묘지에서는 유대인 묘지임을 상징하는 다윗의 별을 볼 수 없었다.

유대인 묘지는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입구 역시 철조망 문이었는데, 표지판에 그려진 다윗의 별 위에 누군가 낙서를 해 놓았다. 디트리히氏는 밖에서 기다리겠다며 얼른 둘러보고 나오라고 했다. 마인츠 유대인 묘지는 묘지 면적의 5분의 1 정도 차지하고 있었다. 유럽의 유대인 묘지가 대부분 그러하듯 맨바닥에 묘비만 우두커니 박혀 있었다
.

그러나 최근에 만들어진 유대인의 무덤은 파리의 것과 똑같이 고급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파리의 것과 다른 점이 한 가지 있다면, 독일인 무덤과 같이 護石으로 자리를 잡고 그 안을 꾸민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화초를 심고 가꾸는 대신 호석 안에 자갈을 깔았다. 天刑(천형)의 유대인, 그들의 묘지는 그들의 운명과 닮아 있었다
.

필자는 그 길로 마인츠 중앙역으로 가 바이마르行 이체에(ICE:도시 간 초특급열차)를 탔다. 이체에는 프랑크푸르트를 지나 풀다-아이제나흐-에어푸르트를 거쳐 바이마르에 멈추었다. 바이마르 역 앞에서 5번 시내버스를 타고 종점인 프라이드호프(묘지) 정류장에 내렸다.

바이마르 묘지는 마인츠 묘지보다 숲이 울창했다. 조각상도 제법 눈에 띄었다. 묘비와 조각상에는 이끼가 많이 끼어 있었다. 고전문화를 꽃피운 도시다웠다
.

괴테는 실러를 곁에 두고 붉은 참나무棺 속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살아서 문학적 궤적을 나누었던 그들이다. 괴테만은 죽어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배회할 듯싶었다. 「괴테街道」란 여행 루트가 생길 정도로 괴테는 떠돌아다니길 즐겨했다. 괴테는 棺 속에서도 쉬지 않고 배회하고 있을지 모른다
.

이탈리아-죽음이 살아 있는 神殿


로마는 도시 전체가 묘지

로마 피우미치노 공항에 도착했을 때 는 오후 630이었다. 마중 나오기로 돼 있던 목사님은 약속시간이 30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공항 벤치에 앉아 책을 읽으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여관 호객꾼들로 시끌벅적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語 특유의 강세가 여기저기서 시끄럽게 울려 댔다. 머릿속이 점점 어지러웠다.

『안녕하세요. 프랑크푸르트에서 오셨죠』


정확하고 힘 있는 목소리가 고개를 돌리게 했다. 키가 작고, 피부색으로 봐 영락없는 한국인이었다. 그런데 뚜렷한 이목구비와 콧수염은 서양인처럼 보이게 했다.

『아, . 목사님이신가요』


梁俊某(양준모·38) 목사는 한국에서 장로회신학대학을 나와 로마대학 영성신학 박사과정에 있다.

피우미치노 공항에서 테르미니 역까지 가는 고속도로는 정체를 빚고 있었다. 국철로 30분이면 가는 거리를 한 시간째 거북이걸음을 하고 있다
.

같이 멈춰 있는 주위 차들을 둘러보았다. 한국 차종이 눈에 많이 띄었다. 특히 대우차가 많았다
.

이탈리아 사람들이 한국차를 좋아하나 보죠
.

『그럼요. 아마 외국 차종 중에선 한국차가 단연 앞설 겁니다. 고장이 거의 안 나고, 가격도 저렴해서 여러모로 이탈리아에선 인기가 높습니다』


차가 막히는 데는 도로 사정도 있었지만, 梁목사의 깊은 뜻이 숨어 있었다. 차는 숙소인 테르미니 역 방향으로 곧장 가지 않고 콜로세움이 있는 남쪽으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의 眞境(진경)은 밤에 볼 수 있죠』


로마는 도시 전체가 묘지였다. 묘지와 묘지 아닌 것을 구분할 수 없었다. 담 하나로 유물인 것과 유물 아닌 것을 구분할 수 없듯 모든 것은 살아 숨쉬는 묘지였다.

누런 빛 가로등 아래로 유적들이 나타났다. 이곳은 어디인가? 어느새 지하 무덤의 迷路(미로) 속을 헤매고 있었다
.

콜로세움을 뒤로 하고 「포리 임페리알리」 거리를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왼편으로 低地帶(저지대)에 흩어져 있는 무수히 많은 유적들이 눈에 들어왔다.

『목사님, 잠깐 멈추시면 안 될까요』


梁목사가 웃으며 대답했다.

『잠시만 참으세요. 다 왔습니다』


차는 베네치아 광장을 지나 「캄피돌리오」 광장 아래 완만한 계단 옆에 섰다. 캄피돌리오는 영어 「캐피털」의 어원이며, 고대에는 로마의 중심이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최고 神 「주피터」의 신전을 비롯하여 25개의 神殿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계단을 오르자 왼쪽에는 카피톨리노 박물관, 오른쪽에는 콘셀바토리 궁전 미술관이 보였다. 그리고 正面에는 미켈란젤로가 르네상스식으로 再設計한 세나토리오 궁전(로마시청)이 있었다
.

梁목사는 시청의 뒤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곳에서 필자는 棺이 사라진 채 흩어져 있는 수많은 유골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포로 로마노」는 고대 로마의 廣場(광장)이자 심장, 즉 세계의 中心이었다. 歡喜가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나왔다
.

1000년 역사의 로마 시립묘지

다음날 오후 티브르티나에 있는 로마 시립묘지로 향했다. 기원전 1세기부터 서기 4세기까지 로마의 서민들이 묻힌 카타콤베 대신 서기 1000년부터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로마 시립묘지는 로마대학 바로 뒤편에 있는지라 로마대학을 찾아가면 된다. 묘지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바람이 심하게 불고 눈발도 흩날리는 늦은 오후였다. 梁목사 소개로 가이드 李相烈(이상열·31)씨가 우산을 쓰고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

묘지가 오래되어 보이는데
.

1000년의 역사를 가진 로마 시립묘지가 지금과 같은 현대식으로 건설된 것이 1936년입니다. 흙을 덮으면서 동시에 구역을 확장해 나간 것이죠』


정문을 지키고 있는 묘지 관리인은 오후 6 전에는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정문은 로마의 건축물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붉은 벽돌과 흰 벽돌로 이루어져 있었다. 가운데 세 개의 철문이 있으며 그 사이에 네 개의 동상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죽음을 표현하고 있었다.

로마 시립묘지와 다른 나라 묘지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

『로마 시립묘지는 크게 개인구역과 납골당으로 이루어진 일반구역으로 나뉘어 지죠. 고대 로마로 치자면, 귀족과 서민의 묻히는 장소가 다르다는 거죠』


정문을 통해 들어가면 일단 중앙에 넓게 펼쳐진 大路에 놀라게 된다. 그 길을 따라 계속 걷다 보면 가운데 回廊(회랑)에 둘러싸인 로마 가톨릭교회를 보게 된다
.

로마 시민들은 화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

1980년대 들어 교황청에서는 화장도 敎理(교리)에 어긋나지 않음을 公表(공표)하게 됐습니다. 그 이후 많은 이탈리아 사람들은 삶을 마감하는 예식으로 화장을 선택하고, 대개 일반구역에 묻히게 되었죠』


부유층은 어떻습니까.

『부유층의 경우, 교회 오른편에 있는 개인구역에 묻힙니다』


죽음을 인식하는 사람은 천박하지 않다

개인구역의 무덤들은 무덤이라기보다는 큰 건축물이었다. 가격은 1억에서 수십억원에 이른다. 고대 로마의 전형적인 神殿과 닮아 있다.

일종의 가족묘로 입구와 창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볼 수도 있다. 안에는 작은 재단과 촛불, 가족의 이름들과 사진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죽어서도 집에서처럼 편안히 살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까. 하지만 프랑스나 독일의 묘지에 비하면 사치스럽게만 느껴졌다
.

로마 시민들이 화장을 꺼려하지 않습니까
.

『몇 년 전부터 로마 시립묘지는 「투물라치오네」라는 장례 방식을 도입했습니다. 투물라치오네는 시신을 관에 안치시킨 다음 수년이 지난 후, 유골을 모아 더 작은 공간에 안치하는 방식이죠』


어쩌면 「투물라치오네」 역시 실용적인 로마 시민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장례 관습이라 여겨진다. 로마 시민의 사고방식은 철저하게 實用的(실용적)이다.

이미 해는 지고 앞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날이 어두워졌다.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묘지 정문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정문에는 묘지 관리인이 손목시계를 보며, 다른 한 손으로는 철문을 서서히 밀고 있었다.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묘지 출입에도 시간이 정해져 있다니. 진정 죽음은 예고 없이 엄습할까. 삶이 분명 정해져 있기에, 죽음 역시 삶에 바싹 붙어서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

다음날 아침, 피우미치노 공항으로 향했다. 차는 막히지 않았고, 하늘도 맑디맑았다
.

『로마는 어떠셨나요』라는 梁목사의 물음에 나는 『죽음이 살아 있는 묘지였습니다』라고 대답했다
.

『그럼, 復活(부활)이군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죽음마저도 사랑해 조각상을 만들고, 물을 주고, 神殿을 만드는 사람들. 길을 걸어가더라도 步道로 가지 않고, 묘지의 오솔길을 택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삶과 죽음은 떨어져 있는 세계가 아니었다. 살아가면서도 죽음을 인식하는 사람은 천박하지 않다. 죽음을 잊고 멀리하는 사람은 이미 주검과 다름없다. 유럽의 묘지는 삶과 죽음이 만나는 공간이었다. 두 영혼이 기도를 통해 나누는 對話였다.